개인 도보여행 사진

걷기여행-09년01월26일 운현궁~경복궁(궁따라 잡아라) 도보 사진1

코리아트레일 2009. 1. 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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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雲峴宮)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천도교중앙대교당(天道敎中央大敎堂)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경복궁(景福宮)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