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걷기여행-09년02월04일(수) 입춘대길 봉화산~태릉~불암사 답사 도보 여행
걷기여행-09년02월04일(수) 입춘대길 봉화산~태릉~불암사 답사 도보 여행
01.모임장소 : 7호선 중화역 2번 출구 역내
02.모임시간 : 오전 11시 (11시05분에 출발합니다.지각 하시면 벌금 1,000원 있습니다^^)
03.도보코스 : 중화역~봉화산~화랑대~태릉~불암사~202번 종점
04.도보거리 : 15km 정도 예상(점심은 매식합니다)
05.도보시간 : 4~5시간 예상(휴식 시간 포함)
06.도보준비 : 물,간식,방풍의,트레킹화(운동화),편안한복장(등산복좋음),수건,모자,선글라스,썬크림등
07.도보주최 : 손성일 010-5257-3765(전화번호가 변경됐습니다.꼭 저장해 가세요~)
08.기부도보 : 참가자분들에게 기부금 1,000원씩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합니다.
09.도보회비 : 개인 식사비+2,000원(태릉입장료+주최자 식비)
11.난 이 도 : 도보 난이도는 중.하
12.신청양식 : 참가1/손성일/하고싶은 말
참가 신청은 신중히 하세요^^ 혹시 신청 후 당일 불참하시면 꼭 연락 바람니다.
참가자분들에게 기부금 1,000원씩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합니다.
http://local.daum.net/road/map.jsp?URLX=486513&URLY=1141604&URLSCALE=80&URLC=X 대중 교통 검색
봉화산(160m) (서울특별시)평지에 돌출되어 있는 독립구릉이다보니 "봉우재"라는 이름도 있다. 동북쪽 기슭에는 먹골배 밭이 산재해 있었지만 지금은 공원, 아파트 단지 등으로 잠식되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서쪽 기슭에 태릉중학교가, 북쪽 기슭에는 중랑구립도서관, 중랑구립체육관, 개방형 자율학교 원묵 고등학교가 위치해 있고, 남쪽 기슭에는 중랑구청이 들어서 있다. 역사봉화산이랑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아차산 봉수대가 있었다. 북쪽 한이산에서 연락을 받아 목멱산(남산)으로 연락했다. 400년 전부터 주민들이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1994년 11월 봉수대를 복원하였고 1992년 여름 화재로 소실된 산신각 자리는 적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봉화산 주변에는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구민들이 즐겨 찾는다. 문화재봉화산에는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기념물 제15호 아차산 봉수대지(1993년 11월 30일 지정)와 무형문화재 제34호 봉화산도당굿(2005년1월 10일 지정)가 있다. 함께 하기중랑구청에서는 매년 여름(5월 ~ 11월)마다 시민대상 공원이용프로그램으로 "숲속여행"을 운영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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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내동 123번지(중랑구청 뒤) 약 8000평 부지에 조성된 봉화산근린공원(2006.3)은 점토벽돌로 포장된 110평 규모의 진입광장을 비롯해 어린이 놀이터, 전통놀이마당, 주민건강마당, 야외무대 및 주민 쉼터 등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공원을 따라 순환하며 조깅을 즐길 수 있는 630m의 외곽산책로와 공원 정상부에 800평 규모의 잔디마당, 장애인을 위한 전용 체력단력장 등으로 함께 조성됐다. 이밖에도 중랑구청을 찾아온 민원인들을 위해 구청 정문에서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인공폭포를 조성했고 구청의 다양한 야외 문화예술 공연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이벤트광장을 인공폭포와 연계해 조성했다. |

![]() 봉화산인공폭포 |
![]() 봉화산 근린공원 |
![]() 봉화산 근린공원 | |||
![]() 봉화산 근린공원 |
![]() 봉화산 근린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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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頭)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이 예외를 이룬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을 통틀어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며, 안면 부분을 제외하고는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 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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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승하하자 4월 12일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6월 4일 태릉으로 고쳤다. 7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예장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에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하고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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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
- 관람소요시간 : 40분 | ||||||||||||||||||||
※ 강릉은 비공개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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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 동행이 소인과 대인을 합하여 20인 이상일 경우 각각의 단체요금을 적용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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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대상 : 6세 이하 및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신정.설날.추석(한복착용자) ※ 둘째,넷째주 토요일 소인(7세~18세)은 무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