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일 자유게시판

[스크랩]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과 삼남길을 소개합니다.

코리아트레일 2011. 4. 15. 10:41

삼남길은 조선의 10대 대로중 하나인 삼남(호남)대로를 기초로 하지만 삼남대로를 그대로 복원을

 

하는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게 새로운 트레일 코스로 개척하여 만들고 있는 길입니다.

 

옛 삼남대로는 서울~해남~제주까지 이어지는 길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고 보부상이 물건을 팔러 한양으로

 

가던 길이자 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유배를 떠나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옛 삼남대로는 현재 대부분 아스팔트에 묻혀 옛 정취를 느끼면서 걷기에는 불가능합니다.

 

 

2008년 다음 카페 "아름다운 도보여행" 카페 회원분들과 함께 남아 있는 옛 삼남대로를 바탕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아름다운 흙길과 숲길 그리고 시골의 농로를 따라서 최대한 안전하게 

 

땅끝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삼남길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코오롱스포츠에 후원을 제안하여 2010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코오롱스포츠에서

 

"12인의 삼남길 개척단" 모집하여 저를 포함한 삼남길 개척팀에서 한 코스를 만들기 위해

 

몇달간의 사전 답사를 통해 코스가 정해지면 코오롱스포츠의 "12인의 삼남길 개척단"이

 

모든분들이 걸을 수 있도록 표시를 하며 삼남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2010년05월부터는 비영리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에서 삼남길 개척 및 관리를합니다.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은 새로운 삼남길을 개척하여 땅끝부터 서울까지 그리고 통일 후

 

북한 지역의 길까지 개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몇년 후 삼남길 개척을 완료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대표적인 트레일 코스로 여러분들이

 

땅끝에서 서울까지 안전하고 아름다운 삼남길을 행복하게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강진에서 제주도 가는 배가 출항되면 제주도 관덕정까지 삼남길을 연장 할 계획입니다

 

 

2015년까지 삼남길은 땅끝에서 출발하여 강진 - 영암 - 나주 - 광주 - 완주 - 정읍 - 익산 -

 

논산 - 공주 - 천안 - 평택 - 수원 - 남태령 -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현재 거리는

 

600km 이상의 코스가 나올것으로 예상합니다. 삼남길은 전국에 숨겨진 보물같은 우리의

 

아름다운 국토의 속살을 보여주는 길이 될것입니다. 우리는 중앙부처나 지자체에서처럼 수십억의 예산을 

 

사용하며 탐방로를 만드는것이 아니라 한 코스당 10배의 가까운 길을 직접 두발로 걸으며 숨겨진 길을 찾고

 

숲을 이어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드는것처럼 혼을 담아 장인 정신을 가지고 삼남길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남길속에서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삼남길을 걷는 여러분들과 아무 댓가 없이 삼남길을 내어준 고마운 지역 주민 여러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남길속에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들 또한 함께

 

공존하면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회원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어린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아름다운 도보여행 손성일 올림

 

 

 

삼남길이란

손성일 대장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만들어가는 감동 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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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서울신문의 삼남길 기사입니다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 땅끝~ 강진 2007.06.25

서울신문의 기획 시리즈인 ‘다시 걷는 옛길-호남대로’가 영남대로에 이어 시작됐다. 전남의 해남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1000리 길을 답사하는 긴 여정이다. 길섶 곳곳에 스며 있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쉬어도 가고, 뜀박질도 하면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지금, 대부분의 옛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도로 개발 등에 편입된 곳이 많다. 길이란 교통로 역할뿐아니라 고장의 문물, 풍속을 전파하는 정보의 소통로이다. 호남의 옛길도 ‘남도 해양문화’를 한양에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때로는 왜구의 침략로로, 어떤 때에는 귀양길로 이용됐다. 호남길을 따라 걸으며 길의 역사와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천착(穿鑿)해 본다.

 

 

호남의 땅끝에서 한양에 이르는 1000리 길의 호남 시발지는 전남 해남땅 관두포항과 강진 마량항으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이들 일대의 길이 군사적 목적으로 개설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신라시대∼고려∼조선시대를 잇는 세월 동안 왜구 등의 침탈(侵奪)을 막기 위해 해안선에 진(鎭)과 영(營)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남과 마량항은 제주로 가는 뭍의 마지막 지점으로,‘제주로’라고도 불렸다. 조정은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귀양보내거나, 임지에 파견하고 군사를 이동시켰다. 제주 사람들이 범선으로 육지에 도착해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한양길에 오르는 길이었다. 땅끝 해안가에 살던 선인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이용했다. 머나먼 여정 속에 머무는 길목에는 자연스레 역(驛)과 원(院)이 생겨났다.

●관두포는 관로(官路)

전남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관두포)와 북평면 이진마을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자 한양에 오르는 첫 길이었다. 이진과 관두포에서 각각 북쪽(한양)으로 출발한 길은 강진군 성전에서 다시 만난다.

관두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관청 ‘물목’이었다.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이 이듬해 관두포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 마을 오른쪽에 솟아 있는 관두산은 해발 178m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수 돌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봉수터로 쓰였다. 마을 노인정에서 만난 채남두(76)씨는 “마을 안쪽에 ‘관터’와 ‘영터’가 있었다.”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 가공공장과 집들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관두산 아래 평지를 ‘몰돌지’라고 부른다.”며 “이는 제주 방언인 말(몰)을 돌리는 공간으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추정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해남읍에서 관두포를 향해 ‘관머리’(관두)를 세번 외치면 무서운 학질도 떨어진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했다. 관청과 군영의 ‘위세’가 선인들의 삶을 얼마나 고달프게 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한때 관리와 군졸, 짐꾼·상인들로 북적였던 관동마을은 지금 한적한 농어촌으로 변했다.

●한양 향한 옛길 따라

호남길 시발지인 관두포를 뒤로 하고 국도 13호선을 따라 완도 쪽으로 8㎞쯤 가다 보면 현산면 하구시 마을이 나온다.‘구시 저수지’ 뒤쪽으론 고산 윤선도가 54세(1640년)부터 9년간 머물렸던 금쇄동(金鎖洞)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터를 잡아 ‘회심당’이란 집을 짓고,‘산중신곡’이란 시조를 읊었다. 지금은 고산의 묘소와 윤씨 제각(祭閣)만 방치돼 있다. 호남길은 13호선을 따라 하구시 바로 아래쪽 고현마을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때 해남현 관아였던 현산면 고현에서 서울을 가려면 ‘오도재’란 대둔사 골짜기를 넘어야 했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려 있다. 그러나 길은 오도재 8부 능선인 덕흥리에서 끊기고, 이 재(고개)를 넘어 대둔사 계곡에 도착하려면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이 고개를 넘던 관리들은 삼산면 평활리에 있던 녹산역에서 말을 공급받았다. 이곳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지금의 해남읍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옥천면 백호리∼송산리를 거쳐 계곡면 별진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강진군 성전으로 빠져나간다.

옛 지리지에는 해남에서 북행하는 첫 역참(驛站)은 별진역이고 북으로 3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별진’이 ‘성진’으로 이름이 바뀌어 계곡면 소재지가 되면서 별진역 터를 확인할 길이 없다. 주민들은 “이 역을 지나간 관리들이나 찰방(조선 때 역참 일을 맡던 외직 문관 벼슬) 송덕비 10여개가 마을앞 거리에 서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사업 때 모두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또다른 출발지 이진항

관두포항이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관로’ 였다면 이진항은 민·관이 두루 활용했다. 이진마을은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바로 건너편이다. 이곳은 강진 마량항에서 고마도를 지나 완도와 해협을 이루는 길목으로 통한다. 이진 역시 수군만호가 주둔했던 주요 군사 거점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을 쌓는 데 제주사람이 동원될 만큼 한양∼제주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호남길은 강진군 신전·도암면과 강진읍을 거쳐 성전·영암 등 북쪽으로 이어진다.

성전은 해남읍과 강진 방면에서 각각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석제원(石梯院)이란 나그네 쉼터가 있었다. 이진∼강진읍에 이르는 옛길은 지방도 813호선으로 포장된 신작로로 변했다. 지금은 옛길임을 짐작할 만한 표지나 건물터를 찾기 어렵다.

도암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쯤 가다 보면 바위를 깎아지른 듯한 석문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석문교 오른쪽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석문협곡에 들어서면 절리를 이룬 바위덩이가 무너져내릴 듯 자리한다. 이 길은 옛 강진 읍성을 지나 최근 확·포장된 2번 국도와 나란히 성전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는 구한말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항일 의병들이 강제 동원돼 건설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다산 18년간 머물며 불후의 저작 남겨땅끝마을∼한양간의 옛길 시발지는 ‘귀양길의 끝자락’이다. 전라도의 해안가 고을은 귀양지였거나 섬 귀양지인 제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각종 문헌에서는 강진과 제주, 해남, 진도 등이 귀양지로 자주 등장한다.

강진군 도암면에는 다산초당이 있다.1801년(순조 1년)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다산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과 호남 옛길을 따라 나주까지 귀양길을 동행한다. 형과 헤어진 다산은 영암∼풀치재∼성전(석제원)을 거쳐 강진으로 들어오고 정약전은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된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머물면서 목민심서 등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강진읍의 남강서원은 송시열(1607∼1689년)을 모시고 있다. 송시열이 1689년 강진항을 통해 제주로 귀양가던 길에 바람이 불어 백련사에 잠시 머물 때 강론한 것을 기념해 세운 서원이다.

해남읍 연동리의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1587∼1674년)가 1640년 영덕 유배 생활을 마치고 은둔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는 완도, 보길도와 해남을 오가며 시조문학의 백미로 치는 어부사시사·오우가 등을 저술했다.

이들 조선시대의 관리는 한양땅에서 출발, 호남 옛길을 따라 전라도 벽지와 제주로 향했다. 이 때문에 문학과 그림 등 선현들의 수많은 저서가 호남대로의 끝자락에서 탄생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출처 : 아름다운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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