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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여영.이현택]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나는 기부를 한다.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기부금 때문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도 있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스타일' 중 주인공 이서정의 독백-
백영옥이 쓴 소설 『스타일』(예담, 2008)은 2535 세대의 일과 연애, 그리고 삶의 방식을 경쾌하게 그려낸 베스트셀러다. 소설 속 주인공 이서정은 잡지사 편집장이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구두에 열광하는 이다. 동시에 기부로 아프리카 아이 한 명 정도는 키워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사실 명품 구두가 꼭 필요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졌을 때 느끼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내가 벌어 산다는 만족감이 더 크다. 이들은 명품 구두를 살 때 느끼는 감정을 기부를 통해서도 얻는다.
기부라면 뭔가 특별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다. 이들에게 기부는 '큰돈을 한목에 내고,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문화·패션계 인사들을 포함해 감각적인 사람들은 기부를 더 이상 어렵고 거창한 의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스타일리시한 삶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더 스타일을 살리는 방식으로 기부를 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설도윤의 뮤지컬 기부=뮤지컬 제작사인 설앤컴퍼니의 설도윤(49) 대표에게 기부는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힘든 청소년들에게 뮤지컬을 관람하거나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 2월 뮤지컬에 대한 재능이 있지만 환경이 어려운 학생 100여 명을 선발, 1년3개월간 연기와 음악, 연출을 가르쳤다. 곧 2기도 선발할 예정이다. 수료생 중 재능이 뛰어난 친구들에게는 무대에 설 기회도 부여할 생각이다. “제가 지도한 학생들이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훌륭한 작품의 주인공을 맡을 수도 있겠죠. 청소년들이 역경을 딛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보람입니다.”
그의 뮤지컬 기부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000여 명의 불우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 중 하나였던 '캣츠'를 보여줬다. 그 비용만도 1억원이나 들었다.
설도윤의 뮤지컬 기부는 급성장 중인 국내 뮤지컬계에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내 간판급 뮤지컬 배우인 최정원(39)·남경주(44)와 가수 유열(47) 등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시간을 쪼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각 지역 자치단체의 사회복지관에서 추천한 학생 가운데서 선발된 학생들은 매주 방과후 한 차례 서울 대학로의 한 연습실에 모여 세 시간씩 춤과 노래, 연기 및 연출 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 설 대표는 기존의 일회성 기부와 차별화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자신을 거쳐 간 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추가적인 후원자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관리할 계획이다. 지난해 부터 설 대표의 이런 기부에 SK그룹이 연간 5000만원을 후원을 하고있다.
◇일과 놀이의 중간지대, 기부=스타일리시한 기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과 결부해 즐겁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기부는 놀이다. 패션·문화계에서 진행 중인 '티셔츠 기부'가 좋은 예다. 단순히 티셔츠를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 분야의 대표주자들이 각자 디자인한 티셔츠를 판매한다(여성복 구호매장에서 6만원씩 700매 한정 판매). 그리고 판매 수익금 전액을 시각장애 어린이들에게 기부한다. 현재까지 25명의 어린이가 이 티셔츠 수익금으로 개안(開眼) 수술을 받았다. 티셔츠의 이름은 '하트포아이(Heart for Eye)'. 디자이너 정구호, 모델 송경아, 사진작가 권영호, 재즈피아니스트 진보라 등 4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진보라(21)는 하트포아이 티셔츠에 민요 '아리랑'의 악보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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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영·이현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