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도보 사진

도보여행-08년09월23일 동망봉~낙산공원 평일 야간 도보 사진

코리아트레일 2008. 9. 24. 08:55

1.도보코스: 동묘역~숭인근린공원~동망봉~낙산공원~종로5가 

2.도보거리:6km 

3.도보시간:19:40~21:00  1시간20분

4.도보날씨: 맑음

5.도보인원: 터벅이님,단재님,버티고님,산마루님,김은정님,페퍼민트님,오케이님,손성일 8명 

6.기부합계:지각 카페 기금 1,000원

 

동망봉

종로구 숭인 1동에 위치한 동망봉은 ‘동쪽을 멀리 바라본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어린 나이에 단종과 헤어진 정순왕후가 이후 60여 년간 단종이 유배 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던 슬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 동망봉 유래비 ⓒ2008 CNB뉴스




 

 

 

 

 

 

 

 

 

 

 

 



 

▲ 정업원(청룡사) ⓒ2008 CNB뉴스
정순왕후는 영도교에서 단종과 헤어진 지 4개월 뒤인 세조 3년(1457) 10월 4일, 영월에서 신분이 강등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이후부터 정순왕후는 동망봉에 올라 무려 64년간 지아비인 단종의 명복을 빌었는데 이렇게 단종을 그리며 오랜 세월을 홀로 보낸 정순왕후 송씨의 정절과 충절을 기리고 안타까운 두 사람의 혼을 불러 후세에서 다시 해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7일에는 단종의 유배지로 단종제를 지내고 있는 강원도 영월군과 공동으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청령포 해후'를 준비했다.

간택된 왕비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방문해 그곳에 있는 단종과 재회하는 것으로 '천상해후'라는 제목의 진혼무를 포함한 단막극 형식의 퍼포먼스가 펼쳐질 예정이다.

열네 살의 어린 왕과 열다섯 살 난 왕비가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는 수양대군을 비롯해 열여덟 명이나 되는 야심만만한 숙부들뿐이었고 정치적 야욕이 강한 숙부들은 어린 왕에게 의지처이기 보다는 위협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재주와 지략이 특출했던 수양대군은 단종의 치세기간 동안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이 힘겹게 쌓아올린 조선왕조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이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성삼문과 박팽년 등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자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친동생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조의 오랜 친구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도 이 역모를 함께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2008 CNB뉴스
◎ 동망봉(東望峯)의 유래, 젊은 나이로 문종이 요절하자 그의 열두 살 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453년(단종 1년)에 간택되고, 이듬해 왕비에 책봉된다.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된 그녀에게 시부모는커녕 수렴청정을 해줄만한 시할머니조차 없었다.

◎ 영도교(永渡僑),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고 정순왕후는 도성 밖으로 쫓겨났을 때,18세 소녀 왕비 송씨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 왕 단종을 눈물로 영원히 이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청계천의 다리는 영영 이별한 다리, ‘영이별다리’로 불리다가 후일 영도교(영원히 건너간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다리는 성종이 안암동 개운사의 비구니들을 동원해 만들었으며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슬픈 역사를 기억해 영도교라 이름짓고 어필을 내렸다고 한다. 이 다리는 흥인지문에서 나와 물류의 중심지들인 왕십리, 뚝섬, 광나루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다리여서 통행량이 많았으나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때 석자재로 공출되어 부서졌고 대신 나무다리가 놓였으나 자주 유실되어 징검다리가 놓였다고 한다. 20세기 와서는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는데 1950년 말경의 청계천 복개공사로 다시 사라지고 21세기에 들어서 2005년 말에 끝난 청계천 복원 사업 때 다시 재건축되었다. 다리로써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 자주동천(紫芝洞泉, 종로구 창신동)과 여인시장 터, 낙산 동쪽 자줏골에서 정순왕후는 어려운 생활로 인해 시녀들과 함께 피륙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 저고리의 깃, 옷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이 때 자주동천 샘물을 이용해 염색을 하고 바위에 널어 말렸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이 샘을 자주우물, 바위를 자주바위, 마을 이름도 자줏골, 자주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각자되어 있다.

한편, 왕비가 어렵게 지낸다는 소문이 장안 아낙네들 사이에 퍼지자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고 지금의 숭신초등학교 자리에 채소, 과일 시장을 세웠는데, 조정에서 이를 금지하자 조정의 감시를 피하고 밀고자들을 막기 위해서 여덟 살 이상 남정네들의 출입을 막아 '금남(禁男)의 시장' 이른바 여인시장을 운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그 근처에 '여인시장 터'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동망정에서-퇴근 후 바로 오신 오케이님과 페퍼민트님

 멀리서 오신 산마루님(광명)과 김은정님(안산)

 동망정에서 본 서울 야경

 단체 사진-페퍼민트님,오케이님,버티고님,산마루님,김은정님,단재님,터벅이님 전 사진사

 낙산공원에서-역시 퇴근 후 바로 오신 버티고님과 페퍼민트님.발은 오케이 ㅋ 

 

 남산과 N타워

 오케이님은 운동화를 준비했군요-요즘에 좋은일이 있다는군요? 뭘까요~

 

 버티고님,페퍼민트님,단재님

  

 낙산공원에서 하산(?)

 밤이라 움직이는 회원분들 사진찍기가 너무 힘들어요~

퇴근후에 바로 오신분들과 멀리서 오신분들 모두 반가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