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 걷기2/시목~석촌~압록~화개~섬진교~망덕포구
강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추억이 된다
글·사진 황소영 기자
너른 평야와 번잡한 공업지대를 비껴간 섬진강은 비록 우리나라 4대 강에는 끼이지 못하지만 그 덕에 서슬 퍼런 개발의 칼날을 빗겨 갔다.
비교적 깨끗한 수질과 아름다운 풍광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것을 보면 차라리 발전이 더딘 것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길은 지난달 끝난 곳에서 이어진다.
물줄기는 도로 너머로 모습을 숨겼지만 우리의 두 발은 몸을 숨긴 강줄기를 찾아 남해의 넓은 바다까지 이어질 것이다.
8장의 지형도(5만분의1) 중 지난달에 미처 끝내지 못한 세 번째 지형도 ‘순창’을 손바닥에 쥐어본다.
꼬깃한 종이 주름 사이로 새파란 실선이 환하게 손을 내민다.
넷째 날, 21번 국도~무수~석촌~곡성 끊어진 길에서 다시 시작하다
전북 순창에서 내월·지북행 버스를 타고 지난번 일정을 끝낸 21번 국도 어중간한 장소에 발을 내딛는다.
아침 7시, 한 달 전 이곳을 떠날 때와는 달리 세상은 온통 희뿌연 비구름에 덮여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을 기세다.
길도 산도 여전하지만 강은 그간 내린 비로 수량을 수십 뼘이나 더했고, 풀들은 무거운 잎을 길게 늘인 채 잠들어 있다.
배낭 커버를 단단히 씌우고 원촌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촌에서부터 길은 24번 국도가 된다.
강을 왼쪽에 두고 15분쯤 걸으면 유적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잠시 가야 할 코스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강은 남쪽으로 길게 흐르지만 길은 언제나 강의 편이 아니었다.
24번 국도는 아침에 떠나온 순창읍으로 이어지고 중간에 방향을 튼다 해도 강줄기를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적교를 건넌다.
최대한 강을 따르되 나름대로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침 8시 12분 무수마을로 진입하자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배낭 옆에 끼워둔 우산을 펼쳐들지만 그것 또한 편할 리는 없다.
오버재킷이나 판초우의는 보행 중 더위만 더할 뿐 우산도 우의도 모두 뒤로 하고 무작정 빗줄기 속으로 들어선다.
마을 입구엔 ‘근심 없는 무수마을’이란 글귀가 써있고, 그 표지석 너머로 한 팔을 잃은 어르신이 밭이랑 사이에 앉아 풀을 뽑는다.
하얗게 서리 내린 숱 없는 머리카락 위로 보슬보슬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전 9시 16분 유촌교를 건넌다.
도로를 따라 15분쯤 진행하자 왼쪽으로 제방 진입로가 보인다.
아스팔트보단 제방길이 수월한 법. 대풍교에 닿자 ‘국가하천 섬진강’이란 커다란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행정구역은 남원시 대강면이 된다.
진안에서부터 흘러와 갖가지 이름으로 불려온 강줄기는 본격적으로 섬진강 이름표를 달고 신나게 내달린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설탕을 적절히 섞어놓은 미숫가루 같다.
비가 많이 오긴 온 모양이다.
오전 11시 38분 제암마을을 거쳐 광덕원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아직 정오도 안 됐지만 새벽 일찍 김밥 몇 줄로 허기를 채운 터라 걸음이 부쩍 더뎌진다.
광암마을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압력밥솥에 잡곡까지 넣어 밥을 짓는다.
쉬어버린 김치와 심심한 찌개가 전부지만 우리에겐 진수성찬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덕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한참이나 숨어 있던 강이 살갑게 와 닿는다.
사석교 건너 석촌삼거리에 닿으니 순창과 곡성으로 갈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일단 석촌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마을 입구에는 고리봉 산행을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서있다.
고리봉 2.8km. 그럭재~문덕봉~비홍치…. 길을 걷는 내내 눈앞에 가득 들어찬 우람한 산줄기에 궁금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다.
일행 중 몇은 지난 겨울 다녀온 고리봉 산행을 떠올리며 으스스 몸을 떤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단다.
그늘 평상에 앉아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랜다.
익숙한 지명이 나오면서 꿈틀꿈틀 잠들었던 기운이 솟고 있었다.
30분쯤 걸어 나오자 섬진강을 건너는 청계동교가 나온다.
지형도엔 세월교로 표기돼 있는데, 아무래도 청계동교의 오기 같다.
이즈음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는 하나뿐이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이정표가 있고 가야 할 왼편엔 ‘경치 좋은 길 시작’이란 안내판이 서있다.
이제부터는 곡성군이다.
오후 4시 14분 섬진강을 왼쪽에 두고 이동한다.
지형도는 드디어 ‘순창’에서 ‘남원’이 된다.
5만분의1 ‘남원’에 등장하는 섬진강은 지형도 왼쪽 하단에 간신히 걸쳐졌다.
오늘 안엔 어렵겠지만 내일 오전 중에는 이 지형도와도 이별할 것이다.
총 8장의 지형도, 하나씩 펼치고 접어 넣으며 점점 섬진강 깊숙이 발을 들여놓는다.
출발 20분만에 청계동 입구에 닿는다.
휴양지로 조성해놓았지만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동악산(736.8m)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약 4km에 걸쳐 시원한 계곡을 이루는 곳. 이 물은 청계교 아래를 흘러 섬진강에 합류한다.
계곡에 앉아 두 손 가득 물을 적신다.
한여름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억울하고 답답한 여행이 어디 있겠는가. 시원하다, 참 시원하다.
젖은 몸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청계동 황토집(061-362-6464)’ 간판이 보인다.
아이스크림 전용 냉장고도 있다.
더위엔 장사가 없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들어섰는데, 넙적한 냉장고 안이 텅 비었다.
주말에나 채워 넣을 것이란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이다.
“아이스크림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식당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야 있나요. 여기 앉아서 시원한 수박이라도 들어요.”전남 여수가 고향이라는 주인댁은 시커멓게 탄 얼굴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들어선 대형 배낭 무리가 신기한지 전라도 인심을 아끼지 않는다.
“혹시 돈을 받는 것 아니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말없이 웃음만 보인다.
수박에 커피에 부침개까지 모처럼 여행길에 입맛만 호강이다.
이곳 청계동에서는 동악산 산행이 가능한데 배넘어재를 거쳐 도림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대략 9km, 5시간쯤 걸린다.
섬진강을 따르던 길은 약 40분 정도 더 이어진다.
금곡교 앞에서 ‘경치 좋은 길’은 끝난다.
곡성읍이 코앞이다.
제방을 따르면 동산나루를 거쳐 읍으로 들어가는데, 우리는 그냥 메타세쿼이아 예쁜 가로수를 따라 읍으로 간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섬진강 기차마을’. 새로운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무용지물이 된 구 곡성역의 화려한 변신이다.
시간은 저녁 7시 14분, 촉촉하게 젖은 역전에 2차 구간 첫날의 마지막 발자국을 찍어둔다.
숙박지는 곡성 외곽의 찜질방. 구질구질 장마철에 비박은 내키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고 싶었다.
찜질방 주차장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저녁식사를 한 건 우리들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기들도 모처럼 만찬이다.
일행들 모두 얼굴(심지어 쌍꺼풀에도)이며 종아리에 뻘건 훈장들을 달았다.
그래도 휴우, 이렇게 4일째 일정이 끝을 맺는다.
다섯째 날, 섬진강기차마을~구례~외곡삼거리 지리산 그림자가 강물에 잠겨
섬진강기차마을(www.gstrain.co.kr) 증기기관차는 평일의 경우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딱 두 번 운행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드라마 <모래시계> 등을 촬영했던 곳. 지금도 대부분의 시대극 기차 장면은 이곳 구 곡성역에서 촬영된다고 한다.
기관차는 뿌웅,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섬진강을 달린다.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모든 게 신기하고 즐겁기만 하다.
17번 국도를 달리는 차량들에게도 손을 흔든다.
길은 가정역 맞은편 두가현수교를 건너면서 이어진다.
붉은 색의 멋들어진 두가교는 붕괴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데, 나룻배의 낡은 줄을 교체하기 위해 투입된 6명의 주민이 급류에 휩쓸려 모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차량 통행이 많은 17번 국도보다는 강 건너 2차선 지방도로가 한산해서 좋다.
지형도는 일찌감치 ‘남원’에서 ’구례‘로 바뀐다.
보성강과 합류하는 압록유원지를 지나 낮 1시 53분 유곡마을 정자에 배낭을 내린다.
마을은 섬진강 옆에 있다.
마을 앞길에서 유곡나루까지는 겨우 3분. 하나 뿐인 배는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했는지 몸 안 가득 너저분한 수풀 쓰레기와 뻘을 채우고 있다.
오후 3시 44분 강은 다시 멀어지고 우리는 섬진강호텔 삼거리에 닿는다.
강 건너 구례구역이 보인다.
서울 용산에서 마지막 열차를 타고 어둑한 새벽녘에나 만나는,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산꾼들에게 구례구역은 언제나 이른 새벽처럼 선선하고 설레며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읍까지는 대략 1시간.삼거리 앞 ‘24시슈퍼’에서 우유 하나씩을 사먹는다.
섬진강기차마을 앞 금성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거른 터라 허기가 진다.
오후 5시 57분 구례읍에서 짬뽕 한 그릇씩을 해치우고 서시교를 건넌다.
저 너머로 지리산이 보인다.
부쩍 지리산이 가깝다.
노고단을 넘지 못한 비구름이 산허리에 걸렸다.
산은 구름 위로 머리를 내민다.
기와지붕 같이 유순한 종석대와 중계탑을 가시면류관처럼 쓴 노고단의 완만한 곡선이 구례읍을 굽어본다.
드디어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나는 순간이다.
무수한 지류를 하나로 모으고 호남 산들의 발끝을 적시며 지리산 아래에서 편하게 숨을 쉬는 강.광평마을에서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제방에 붙는다.
어렸을 적엔 이렇게 제방을 걸을 때면 개울에서 뛰어오르던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이 저녁놀에 붉게 물들던 광경을 목격하곤 했었다.
제방은 25분 후에 끝이 난다.
옥지교가 나오면서 지형도는 ‘구례‘에서 ’하동’으로 바뀐다.
U자형 제방이 파도제방과 비슷하게 생겨, 순간 파도리까지 온 게 아닐까 희망을 걸어보지만 아직 파도리까지도 4km가 더 남았다.
옥지교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저녁 7시 6분 동쪽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저녁 8시 23분 간전교를 지나지만 가로등 없는 19번 국도는 온통 어둠 뿐. 간전교 이름은 코앞에 바짝 다가서도 잘 보이질 않는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깊어도 한여름 더위는 떠날 줄을 모른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이 천식 환자처럼 간헐적인 바람을 토해낸다.
바람에 섞인 차량 배출 오염물질도 반갑다.
빠르게 달리는 차량은 우리에겐 한줌이 아쉬운 시원한 선풍기다.
도로 위에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표시도 되어 있다.
현장에 그어진 흰색의 선은 어둠 속에서 으스스한 빛을 발한다.
몸이 오싹하다.
죽은 자가 누웠던 길을 걷는다는 것.밤 9시 8분 송정마을 앞에서 쉬지만 달려드는 모기떼에 잠시도 편하게 앉아 있질 못하겠다.
길을 걷는 게 가장 좋은 안식이자 즐거움이다.
10km를 증기기관차로 이동했다곤 해도 밤 9시가 넘은 야간 행군이 쉬울 리는 없다.
뱃속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배낭이 내리누르는 어깨의 고통도, 휘청휘청 아스팔트를 걷는 발바닥의 고통도, 까마득한 심연 속에서 몸부림친다.
한적한 도로 지리산 기슭으로 풀벌레 소리가 쓰르쓰르 응원을 한다.
“아자!” 아무도 없는 도로에 서서 기합을 넣어본다.
산자락 사이로 뿌연 빛이 뿜어져 나온다.
외곡삼거리, 피아골 입구 검문소일 가능성이 크다.
참아라, 조금만 참아라. 오늘의 숙박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밤 9시 41분 ‘피아골24시한증막’에 들어서니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근육들이 스르르 녹아들기 시작한다.
여섯째 날, 화개~섬진교~답동~오추윗물이 탁해도 아랫물은 맑더라
아침 7시 16분 외곡삼거리를 벗어나 화개로 향한다.
19번 국도상에서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이 갈리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건너편은 전라도, 이쪽은 경상도다.
화개로 접어들면 ‘당신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는 안내판이 일행을 맞는다.
화개 버스정류장 슈퍼에서 음료 하나씩을 사 마시고 화개장터로 이어진 다리를 건넌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들이 이 화개천 끝자락에서 섬진강과 만난다.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는 상당히 맑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화개장터 대장간은 단단히 문이 잠겼고 장사를 준비하는 일부 상인들만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인다.
경상도와 전라도, 섬진강을 잇는 남도대교를 오른쪽에 두고 하동까지는 내내 19번 국도를 따른다.
본격적인 하동 포구 80리 길이다.
오전 8시 20분 부춘마을 입구 맞은편 드라마 <토지> 세트장에서 쉰다.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양말을 벗은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게 파고든다.
도로는 강과 멀어지지만 제방은 강 쪽으로 가깝게 붙어 있다.
제방을 걷다가 강변으로 내려선다.
많은 비가 온 후라지만 황금빛 모래는 따스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를 밟아본다.
지나온 걸음들이 사진을 찍어놓은 듯 하나씩 각인된다.
발끝을 적실 듯한 섬진강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다.
흔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지만 섬진강은 하류에서 그 힘이 발휘된다.
지리산과 백운산, 두 산의 기운을 한껏 품은 강은 탁한 윗물과는 달리 이 하류에서 더 영롱하다.
몸을 닦고 가다듬는 강 스스로의 정화 능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전 10시 49분 평사리공원에 닿는다.
공원은 강변에 있다.
형제봉을 떠난 패러글라이더들은 이 강변에 안전하게 내려앉는 것으로 비행을 마친다.
조금 밋밋할 듯도 한 래프팅도 구례에서부터 이 일대까지 이어진다.
강변공원과 도로를 경계로 한 지리산 자락엔 악양 평사리 무딤이들이 펼쳐졌다.
좋은 모델이 되어주는 소나무 두 그루와 퇴색된 드라마 세트장, 서희가 거닐던 최참판댁, 고소성으로 오르는 길. 평사리까진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에 자리를 잡는다.
아침 겸 점심은 이곳에서 먹기로 한다.
지난밤 야간 이동도 있던 터라 식후 강변의 서늘한 그늘막에서 모처럼 오수를 즐긴다.
여름 어느 날, 우리는 벤치에 널브러진 수박향 은어떼가 되어 꿈속으로, 그 꿈속에서 푸른 섬진강을 유영하며 깊고도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낮 1시 24분이 되어서야 공원을 떠난다.
1시간이나 잠을 잤어도 개운한 건 모르겠다.
오히려 등산화 속으로 들이미는 발이 새삼 불편하고 버겁다.
개치마을을 지나 다시 제방으로 오른다.
이번 제방은 풀들 키가 커서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종아리를 사정없이 긁어댄다.
햇살에 탄 종아리에 날카로운 풀잎의 간섭은 반갑지 않다.
따끔대고 아파 결국은 10분도 걷지 못하고 도로로 내려선다.
강폭이 넓어질수록 길도 넓다.
하동읍이 가까워지면서 강은 바다로 빠질 채비를 서둘렀고, 차량은 그 숫자를 불리며 인도를 걷는 일행들을 서서히 위협하고 있었다.
새삼 ‘섬진강 이대로 영원히 흐르고 싶습니다’라는 표어가 가슴에 깊숙이 들어선다.
이 도로를 4차선으로 확포장한다는 얘기는 한두 해 일이 아니다.
지방선거가 닥칠 때마다 선심 공사격으로 나오는 말인데, 이번엔 심상치가 않다.
굳이 이 차도를 지금보다 넓혀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만약 예정대로 도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섬진강은 부실한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읍내의 분식점에서 김밥 등으로 허기를 달래고 오후 5시 18분 섬진교를 건넌다.
남도대교와 평행선을 그은 채 섬진강 위로 몸을 눕힌 다리. 이 다리를 건너면 광양땅이다.
만약 화개에서 남도대교를 건넌다면 광양 다압을 거쳐 이곳 섬진교까지 올 수 있다.
악양 평사리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반면 다압에는 새하얀 매화로 범벅이 되는 청매실농원과 섬진강의 전설을 상기시키는 섬진나루가 있다.
“고려 우왕 11년(1366) 왜구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침입하자 새까맣게 몰려든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었다.
이를 두려워 한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게 대표적 전설인데, 원래 고운 모래가 많아 가람·사수천·다사강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이 일을 계기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으로 불렸다고 한다.
남도대교를 건널 것인가 섬진교를 건널 것인가, 둘중 어떤 다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동 악양이냐 광양 다압이냐’로 결정된다.
지형도는 ‘하동’에서 ‘곤양’으로 바뀐다.
‘곤양’을 흐르는 섬진강은 한 뼘도 안 될 정도다.
저녁 6시 861번 지방도로를 따르다 답동마을에서 강변 제방길로 내려선다.
강은 제법 바다를 닮아 있다.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배도, 날갯짓을 서두르는 새도 바다가 멀지 않음을 암시한다.
비닐하우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르신들께 길 저편 마을 이름이 무언지 확인한다.
신송과 금동. 그렇다면 망덕포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제방을 따라가면 8km나 될법한 길. 우선 861번 도로로 빠져 나온다.
바람결에 소금내가 묻어올 만큼 포구는 가까워졌지만 오늘 이 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언덕을 넘어서 오추마을을 지나고 갈대숲 사이 외롭게 선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저녁 8시 52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원 나온 차량에 몸을 싣고 광양시의 찜질방으로 이동이다.
졸지에 섬진강 찜질방 기행이 되었다.
중요한 건 도보여행 마지막 밤이란 것과 강은 그만큼 짧아졌단 사실뿐이다.
일곱째 날, 아동삼거리~진월정~망덕포구 망덕포구에 바다만 남았다
오전 10시 13분, 간밤 걸음을 멈추었던 건물 앞에 도착한다.
포구까지는 여유를 두고 걸어도 1시간쯤. 배낭을 지원차량 트렁크에 싣는다.
무거운 배낭에 길들여진 발바닥은 아무것도 없는 어깨에 적응이 안 되는지 붕붕 허공을 딛는 것처럼 어색하다.
지형도는 진작에 ‘곤양’에서 ‘남해’로 바뀐 터. 최장 발원지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212.3km를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흐르던 섬진강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해맑은 바닷물로 승화하기 직전이다.
봉암산성 입구를 지나 아동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니 망덕포구가 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진월면 삼거리 좌측으로 진입하자 곧 바다다.
횟집이 즐비한 조그만 어촌마을엔 낮게 깔린 잿빛 구름과 짭조름한 소금기가 뒤엉켰다.
‘내 고향 망덕포구 새 우는 마을 울고 웃던 그 시절이 하도 그리워 허둥지둥 봄바람에 찾아왔건만 님은 가고 강 언덕에 물새만 운다.
’ 커다란 회색 돌 위에 강석오가 작사 작곡했다는 망덕포구 노래비가 서있다.
그 강이 하도 그리워 허둥지둥 여름 볕에 찾아왔건만 강은 가고 포구에 바다만 남았다.
천상데미에서 시작한 가느다란 물줄기는 남도의 순박한 마을과 정겨운 산들을 지나 무려 270개가 넘는 물줄기를 더해 이제 마지막 열정을 이곳 망덕포구에 묻고 바다로 떠나버렸다.
강은 이렇게 바다가 되고 일주일을 꼬박 걸어온 우리들의 지친 어깨는 길 위에 뿌려진 추억을 되짚으며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INFORMATION
섬진강 도보 여행
한번에 장기휴가를 낼 수 있다면 전북 진안 데미샘부터 전남 광양 망덕포구까지 일주일 가량 도보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안 될 땐 두 구간에 나눠서 하는 게 적당하다.
두 구간을 나누는 기준은 없다.
서너 구간까지 개개인의 일정과 여건에 맞게 즐기면서 진행할 수도 있겠다.
일시든 구간이든 이틀 남짓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면 굳이 안내가 필요 없을 만큼 길이 눈에 익는다.
산과는 달리 마을과 마을, 길과 길을 잇는 여정이어서 지형도 보는 것도 그만큼 빨라지고, 각자의 컨디션에 맞게 도로를 가로 지르거나 강을 건너는 등 적당히 일정 조절이 가능하다.
본문에 실린 것은 취재진 기준일 뿐이므로 각자의 체력에 맞춰 이동할 것을 권한다.
월간지 특성상 취재진은 6월과 7월에 각각 길을 나섰다.
장마와 태풍 등 비를 만날 가능성이 많을 때이므로 이번 2차 구간에서는 1차 때와는 달리 찜질방을 중심으로 숙박했다.
비가 올 경우엔 야영이나 비박도 여의치 않고, 비를 맞든 땀을 흘리든 찜질방에서라면 마음껏 샤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워를 아예 할 수 없는 산중이라면 그럭저럭 땀 냄새와 그로 인한 찜찜함을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도보여행에선 샤워 욕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인원이 적다면 여관 이용도 가능하지만 상류 쪽과는 달리 하류 쪽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지가 발달돼 있어 찜질방 찾기가 조금 수월하다.
넷째 날
전날 미리 전북 순창으로 이동, 영빈모텔에서 1박했다.
순창읍내에서는 영빈모텔이 제일 깨끗한데 6명까지 잘 수 있는 큰방이 있다.
4인 기준 하룻밤 4만원이고, 인원이 추가되면 1인당 5천원씩 더 받는다.
2차 구간 첫날은 지난번 일정을 끝낸 21번 국도(장구목 진입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강은 길에서 다소 멀어진다.
지형도를 보고 시목~원촌을 거쳐 24번 국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도로는 공사 중이고 그 옆에 제방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길과 강줄기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강이 흐르는 대로 길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1차 구간 옥정호 통과처럼 도로를 가로지르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
취재진은 유적교를 건너 무수마을을 통과 유촌으로 나왔다.
유촌마을에는 옛 유촌교가 있어 지형도를 섣불리 흘렸다간 길을 잃는 곤욕을 치른다.
지형도에 나와 있는 유촌교는 허술한 다리가 아닌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유촌대교’다.
작고 낡은 유촌교에서 물줄기 흐르는 방향을 따르면 곧 유촌대교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면 ‘섬진강군민체육공원’이 나오는데 비교적 깨끗한 화장실이 있으므로 급한 볼일은 여기에서 해결한다.
유촌대교를 건너 15분쯤 걸으면 왼쪽으로 제방 입구가 보인다.
아스팔트를 걷는 것보다야 차량 없는 흙길이 훨씬 정겹다.
그러나 제방 역시 강줄기 그대로 나있는 건 아니어서 U자 형태로 휘어져 있다.
30분쯤 걷다가 유풍교를 건너 다시 20분간 제방을 따르면 대풍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순창을 벗어나 남원시 대강면에 닿는다.
강은 커다랗게 굴곡을 이루며 휘돌아 흐르지만 길은 제암~광암을 가로질러 석촌까지 단숨에 내달린다.
아침을 순창의 24시간 김밥전문점에서 부실하게 먹고 온 터라 점심은 오전 11시 48분 광암마을 정자에서 해먹었다.
석촌은 남원 고리봉 등산로 초입 마을이기도 하다.
석촌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730번 지방도로를 30분 가량 걸으면 ‘청계동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행정구역은 전남 곡성군으로 바뀌고 곧 지형도도 ‘순창’에서 ‘남원’으로 넘어간다.
도로변에 ‘경치 좋은 길 시작’이란 안내판이 있을 정도로 길이 좋다.
섬진강을 왼쪽에 둔 이 길은 약 1시간 20분간 이어진다.
취재진은 다음 날 증기기관차를 탈 예정이어서 섬진강기차마을(구 곡성역)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일정을 모두 마친 시간은 저녁 7시 14분. 숙박 장소는 곡성 녹주맥반석찜질방(061-363-7114)으로 정하고 택시(011-601-0513)로 이동했다.
곡성읍에서 찜질방까지 택시비는 5천원. 찜질방 사용료도 1인 5천원. 넷째 날 이동거리는 약 31.5km고 휴식과 식사 포함 총 12시간 걸었다.
지형도는 5만분의1 순창과 남원이다.
다섯째 날
섬진강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는 약 10km다.
평일엔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출발하며, 주말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 출발이 더해져 하루 4번 운행한다.
왕복 요금은 어른 5천원이지만 편도는 3500원으로 비싼 편이다.
무작정 걷는 것도 좋지만 증기기관차를 타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취재진은 오전 11시 기차시간에 여유가 있어 역전 금성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가정역에는 11시 25분에 도착한다.
가정역에 내려 붉은색의 두가교를 건너면 청소년야영장이다.
차량 통행이 많은 17번 국도보다는 이곳의 2차선 지방도로가 걷기에 수월하다 야영장에선 자전거 대여가 가능한데 빌린 자전거는 같은 장소에 반납해야 하므로 일정 진행에는 도움이 안 된다.
사전에 미리 양해를 구해 자전거 편도 운행을 상의해볼 수는 있다(061-362-4186). 섬진강을 우측에 두고 예성교까지 4.2km, 예성교에서 구례까지는 8.3km다.
유곡마을에는 비교적 관리가 잘 된 공중화장실과 정자 뒤쪽으로 유곡나루가 있다.
청소년야영장에서부터 구례구역 앞 섬진강호텔 삼거리까지는 3시간 걸린다.
이후 구례읍을 관통해 피아골 입구 외곡삼거리까지는 19번 국도를 따라 가므로 크게 헷갈릴 길은 없다.
다만 숙박 예정지인 피아골24시한증막(061-783-7775)까지 가려면 부득이 야간 이동을 해야 한다.
취재진은 밤 9시 41분 외곡삼거리에 도착했다.
찜질방은 도로변에 있어 택시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사용료는 비수기엔 1인 6천원, 성수기엔 12,000원씩이다.
액수가 부담 된다면 2km 떨어진 화개에서의 숙박도 괜찮다.
19번 국도의 보행자 도로는 상당히 좁으므로 꼭 좌측통행을 해야 하며 전원 모두 랜턴을 소지해야 한다.
다섯째 날은 기차 탑승 포함 약 39.5km를 걸었고 총 이동 시간은 10시간 30분이다.
지형도는 5만분의1 남원·구례·하동이다.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역시 하동까지 19번 국도를 따르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강줄기는 상류보다 훨씬 넓어서 어디서든 강을 놓치는 일도 드물다.
늦은 아침은 악양 평사리공원에서 먹었다.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막과 벤치와 물이 있어 편하다.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지만 끓여 먹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그 후 하동읍에서 저녁을 겸한 분식을 사먹었다.
하동읍에서는 섬진교를 건너 광양으로 넘어갔다.
섬진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망덕포구 이정표가 보인다.
861번 지방도로인데 답동마을에서 강가 제방으로 내려설 수 있다.
동네 주민들에 의하면 이 제방이 망덕포구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취재진은 일단 금동마을에서 제방을 버리고 도로변으로 나왔다.
밤 8시 52분까지 걷다가 차량 지원을 받아 오추마을쯤에서 광양의 광영스포렉스찜질방(061-793-8051)으로 이동했다.
1인 사용료는 7천원. 차량지원이 없을 경우엔 마지막 날이 여의치 않으므로 일찌감치 일정을 끝내고 광양행 버스를 타는 게 좋다.
주변에 마땅한 민박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섯째 날 이동거리는 약 31.5km고 휴식과 식사 포함 총 13시간 30분쯤 걸었다.
지형도는 5만분의1 하동과 곤양이다.
마지막 일곱째 날은 역시 차량 지원에 힘입어 전날 마친 곳으로 수월하게 이동했다.
망덕포구까지는 약 4km 남았으며 1시간 걸렸다.
망덕포구 이정표가 잘 보이고 무엇보다 강이 바로 옆에 있어 어렵지 않게 이동 가능하다.
망덕에는 횟집이 많으므로 여행의 여독을 싱싱한 회로 풀어보는 것도 좋겠다.
지형도는 5만분의1 남해.정리하자면 섬진강 도보여행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는 총 8장으로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광양만까지 도엽명 갈담·임실·순창·남원·구례·하동·곤양·남해다.
교통
2차 구간을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교통편이 달라지는데 취재진의 경우 순창에서 시작, 지북(혹은 내월)행 버스를 타고 장구목으로 갈리는 삼거리 21번 국도에서 하차했다.
첫차는 아침 6시 40분이고 약 15분 걸린다.
요금은 850원. 그 외의 지역은 지리산과 가까운 곡성·구례·하동 등이어서 서울 용산역(www.korail.go.kr)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거나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www.nambuterminal.co.kr)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마지막 기착지 망덕포구에는 광양까지 33번·34번·107번 등의 버스가 다니며, 광양시 기준 동서울터미널과 부산 등을 오가는 시외버스도 있다.
![]() |
◇ 전북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270여 개가 넘는 지류들을 한데 모아 구례와 하동을 거쳐 본격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자아낸다. 사진은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바라본 섬진강으로 부산의료원 임대영(www.jiriphoto.com) 씨의 작품이다. |
너른 평야와 번잡한 공업지대를 비껴간 섬진강은 비록 우리나라 4대 강에는 끼이지 못하지만 그 덕에 서슬 퍼런 개발의 칼날을 빗겨 갔다.
비교적 깨끗한 수질과 아름다운 풍광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것을 보면 차라리 발전이 더딘 것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길은 지난달 끝난 곳에서 이어진다.
물줄기는 도로 너머로 모습을 숨겼지만 우리의 두 발은 몸을 숨긴 강줄기를 찾아 남해의 넓은 바다까지 이어질 것이다.
8장의 지형도(5만분의1) 중 지난달에 미처 끝내지 못한 세 번째 지형도 ‘순창’을 손바닥에 쥐어본다.
꼬깃한 종이 주름 사이로 새파란 실선이 환하게 손을 내민다.
넷째 날, 21번 국도~무수~석촌~곡성 끊어진 길에서 다시 시작하다
전북 순창에서 내월·지북행 버스를 타고 지난번 일정을 끝낸 21번 국도 어중간한 장소에 발을 내딛는다.
아침 7시, 한 달 전 이곳을 떠날 때와는 달리 세상은 온통 희뿌연 비구름에 덮여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을 기세다.
길도 산도 여전하지만 강은 그간 내린 비로 수량을 수십 뼘이나 더했고, 풀들은 무거운 잎을 길게 늘인 채 잠들어 있다.
배낭 커버를 단단히 씌우고 원촌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촌에서부터 길은 24번 국도가 된다.
강을 왼쪽에 두고 15분쯤 걸으면 유적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잠시 가야 할 코스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강은 남쪽으로 길게 흐르지만 길은 언제나 강의 편이 아니었다.
24번 국도는 아침에 떠나온 순창읍으로 이어지고 중간에 방향을 튼다 해도 강줄기를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적교를 건넌다.
최대한 강을 따르되 나름대로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침 8시 12분 무수마을로 진입하자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배낭 옆에 끼워둔 우산을 펼쳐들지만 그것 또한 편할 리는 없다.
오버재킷이나 판초우의는 보행 중 더위만 더할 뿐 우산도 우의도 모두 뒤로 하고 무작정 빗줄기 속으로 들어선다.
마을 입구엔 ‘근심 없는 무수마을’이란 글귀가 써있고, 그 표지석 너머로 한 팔을 잃은 어르신이 밭이랑 사이에 앉아 풀을 뽑는다.
하얗게 서리 내린 숱 없는 머리카락 위로 보슬보슬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전 9시 16분 유촌교를 건넌다.
도로를 따라 15분쯤 진행하자 왼쪽으로 제방 진입로가 보인다.
아스팔트보단 제방길이 수월한 법. 대풍교에 닿자 ‘국가하천 섬진강’이란 커다란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행정구역은 남원시 대강면이 된다.
진안에서부터 흘러와 갖가지 이름으로 불려온 강줄기는 본격적으로 섬진강 이름표를 달고 신나게 내달린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설탕을 적절히 섞어놓은 미숫가루 같다.
비가 많이 오긴 온 모양이다.
오전 11시 38분 제암마을을 거쳐 광덕원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아직 정오도 안 됐지만 새벽 일찍 김밥 몇 줄로 허기를 채운 터라 걸음이 부쩍 더뎌진다.
광암마을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압력밥솥에 잡곡까지 넣어 밥을 짓는다.
쉬어버린 김치와 심심한 찌개가 전부지만 우리에겐 진수성찬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덕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한참이나 숨어 있던 강이 살갑게 와 닿는다.
사석교 건너 석촌삼거리에 닿으니 순창과 곡성으로 갈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일단 석촌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마을 입구에는 고리봉 산행을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서있다.
고리봉 2.8km. 그럭재~문덕봉~비홍치…. 길을 걷는 내내 눈앞에 가득 들어찬 우람한 산줄기에 궁금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다.
일행 중 몇은 지난 겨울 다녀온 고리봉 산행을 떠올리며 으스스 몸을 떤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단다.
그늘 평상에 앉아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랜다.
익숙한 지명이 나오면서 꿈틀꿈틀 잠들었던 기운이 솟고 있었다.
30분쯤 걸어 나오자 섬진강을 건너는 청계동교가 나온다.
지형도엔 세월교로 표기돼 있는데, 아무래도 청계동교의 오기 같다.
이즈음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는 하나뿐이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이정표가 있고 가야 할 왼편엔 ‘경치 좋은 길 시작’이란 안내판이 서있다.
이제부터는 곡성군이다.
오후 4시 14분 섬진강을 왼쪽에 두고 이동한다.
지형도는 드디어 ‘순창’에서 ‘남원’이 된다.
5만분의1 ‘남원’에 등장하는 섬진강은 지형도 왼쪽 하단에 간신히 걸쳐졌다.
오늘 안엔 어렵겠지만 내일 오전 중에는 이 지형도와도 이별할 것이다.
총 8장의 지형도, 하나씩 펼치고 접어 넣으며 점점 섬진강 깊숙이 발을 들여놓는다.
출발 20분만에 청계동 입구에 닿는다.
휴양지로 조성해놓았지만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동악산(736.8m)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약 4km에 걸쳐 시원한 계곡을 이루는 곳. 이 물은 청계교 아래를 흘러 섬진강에 합류한다.
계곡에 앉아 두 손 가득 물을 적신다.
한여름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억울하고 답답한 여행이 어디 있겠는가. 시원하다, 참 시원하다.
젖은 몸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눈앞에 ‘청계동 황토집(061-362-6464)’ 간판이 보인다.
아이스크림 전용 냉장고도 있다.
더위엔 장사가 없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들어섰는데, 넙적한 냉장고 안이 텅 비었다.
주말에나 채워 넣을 것이란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이다.
“아이스크림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식당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야 있나요. 여기 앉아서 시원한 수박이라도 들어요.”전남 여수가 고향이라는 주인댁은 시커멓게 탄 얼굴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들어선 대형 배낭 무리가 신기한지 전라도 인심을 아끼지 않는다.
“혹시 돈을 받는 것 아니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말없이 웃음만 보인다.
수박에 커피에 부침개까지 모처럼 여행길에 입맛만 호강이다.
이곳 청계동에서는 동악산 산행이 가능한데 배넘어재를 거쳐 도림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대략 9km, 5시간쯤 걸린다.
섬진강을 따르던 길은 약 40분 정도 더 이어진다.
금곡교 앞에서 ‘경치 좋은 길’은 끝난다.
곡성읍이 코앞이다.
제방을 따르면 동산나루를 거쳐 읍으로 들어가는데, 우리는 그냥 메타세쿼이아 예쁜 가로수를 따라 읍으로 간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섬진강 기차마을’. 새로운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무용지물이 된 구 곡성역의 화려한 변신이다.
시간은 저녁 7시 14분, 촉촉하게 젖은 역전에 2차 구간 첫날의 마지막 발자국을 찍어둔다.
숙박지는 곡성 외곽의 찜질방. 구질구질 장마철에 비박은 내키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고 싶었다.
찜질방 주차장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저녁식사를 한 건 우리들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기들도 모처럼 만찬이다.
일행들 모두 얼굴(심지어 쌍꺼풀에도)이며 종아리에 뻘건 훈장들을 달았다.
그래도 휴우, 이렇게 4일째 일정이 끝을 맺는다.
![]() |
◇ 곡성읍으로 진입하기 전 금곡교 앞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는 취재진. ‘경치 좋은 길’은 청계동교에서부터 여기까지다. |
다섯째 날, 섬진강기차마을~구례~외곡삼거리 지리산 그림자가 강물에 잠겨
섬진강기차마을(www.gstrain.co.kr) 증기기관차는 평일의 경우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딱 두 번 운행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드라마 <모래시계> 등을 촬영했던 곳. 지금도 대부분의 시대극 기차 장면은 이곳 구 곡성역에서 촬영된다고 한다.
기관차는 뿌웅,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섬진강을 달린다.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모든 게 신기하고 즐겁기만 하다.
17번 국도를 달리는 차량들에게도 손을 흔든다.
길은 가정역 맞은편 두가현수교를 건너면서 이어진다.
붉은 색의 멋들어진 두가교는 붕괴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데, 나룻배의 낡은 줄을 교체하기 위해 투입된 6명의 주민이 급류에 휩쓸려 모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차량 통행이 많은 17번 국도보다는 강 건너 2차선 지방도로가 한산해서 좋다.
지형도는 일찌감치 ‘남원’에서 ’구례‘로 바뀐다.
보성강과 합류하는 압록유원지를 지나 낮 1시 53분 유곡마을 정자에 배낭을 내린다.
마을은 섬진강 옆에 있다.
마을 앞길에서 유곡나루까지는 겨우 3분. 하나 뿐인 배는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했는지 몸 안 가득 너저분한 수풀 쓰레기와 뻘을 채우고 있다.
오후 3시 44분 강은 다시 멀어지고 우리는 섬진강호텔 삼거리에 닿는다.
강 건너 구례구역이 보인다.
서울 용산에서 마지막 열차를 타고 어둑한 새벽녘에나 만나는,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산꾼들에게 구례구역은 언제나 이른 새벽처럼 선선하고 설레며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읍까지는 대략 1시간.삼거리 앞 ‘24시슈퍼’에서 우유 하나씩을 사먹는다.
섬진강기차마을 앞 금성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거른 터라 허기가 진다.
오후 5시 57분 구례읍에서 짬뽕 한 그릇씩을 해치우고 서시교를 건넌다.
저 너머로 지리산이 보인다.
부쩍 지리산이 가깝다.
노고단을 넘지 못한 비구름이 산허리에 걸렸다.
산은 구름 위로 머리를 내민다.
기와지붕 같이 유순한 종석대와 중계탑을 가시면류관처럼 쓴 노고단의 완만한 곡선이 구례읍을 굽어본다.
드디어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나는 순간이다.
무수한 지류를 하나로 모으고 호남 산들의 발끝을 적시며 지리산 아래에서 편하게 숨을 쉬는 강.광평마을에서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제방에 붙는다.
어렸을 적엔 이렇게 제방을 걸을 때면 개울에서 뛰어오르던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이 저녁놀에 붉게 물들던 광경을 목격하곤 했었다.
제방은 25분 후에 끝이 난다.
옥지교가 나오면서 지형도는 ‘구례‘에서 ’하동’으로 바뀐다.
U자형 제방이 파도제방과 비슷하게 생겨, 순간 파도리까지 온 게 아닐까 희망을 걸어보지만 아직 파도리까지도 4km가 더 남았다.
옥지교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저녁 7시 6분 동쪽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저녁 8시 23분 간전교를 지나지만 가로등 없는 19번 국도는 온통 어둠 뿐. 간전교 이름은 코앞에 바짝 다가서도 잘 보이질 않는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깊어도 한여름 더위는 떠날 줄을 모른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이 천식 환자처럼 간헐적인 바람을 토해낸다.
바람에 섞인 차량 배출 오염물질도 반갑다.
빠르게 달리는 차량은 우리에겐 한줌이 아쉬운 시원한 선풍기다.
도로 위에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표시도 되어 있다.
현장에 그어진 흰색의 선은 어둠 속에서 으스스한 빛을 발한다.
몸이 오싹하다.
죽은 자가 누웠던 길을 걷는다는 것.밤 9시 8분 송정마을 앞에서 쉬지만 달려드는 모기떼에 잠시도 편하게 앉아 있질 못하겠다.
길을 걷는 게 가장 좋은 안식이자 즐거움이다.
10km를 증기기관차로 이동했다곤 해도 밤 9시가 넘은 야간 행군이 쉬울 리는 없다.
뱃속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배낭이 내리누르는 어깨의 고통도, 휘청휘청 아스팔트를 걷는 발바닥의 고통도, 까마득한 심연 속에서 몸부림친다.
한적한 도로 지리산 기슭으로 풀벌레 소리가 쓰르쓰르 응원을 한다.
“아자!” 아무도 없는 도로에 서서 기합을 넣어본다.
산자락 사이로 뿌연 빛이 뿜어져 나온다.
외곡삼거리, 피아골 입구 검문소일 가능성이 크다.
참아라, 조금만 참아라. 오늘의 숙박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밤 9시 41분 ‘피아골24시한증막’에 들어서니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근육들이 스르르 녹아들기 시작한다.
여섯째 날, 화개~섬진교~답동~오추윗물이 탁해도 아랫물은 맑더라
아침 7시 16분 외곡삼거리를 벗어나 화개로 향한다.
19번 국도상에서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이 갈리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건너편은 전라도, 이쪽은 경상도다.
화개로 접어들면 ‘당신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는 안내판이 일행을 맞는다.
화개 버스정류장 슈퍼에서 음료 하나씩을 사 마시고 화개장터로 이어진 다리를 건넌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들이 이 화개천 끝자락에서 섬진강과 만난다.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는 상당히 맑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화개장터 대장간은 단단히 문이 잠겼고 장사를 준비하는 일부 상인들만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인다.
경상도와 전라도, 섬진강을 잇는 남도대교를 오른쪽에 두고 하동까지는 내내 19번 국도를 따른다.
본격적인 하동 포구 80리 길이다.
오전 8시 20분 부춘마을 입구 맞은편 드라마 <토지> 세트장에서 쉰다.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양말을 벗은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게 파고든다.
도로는 강과 멀어지지만 제방은 강 쪽으로 가깝게 붙어 있다.
제방을 걷다가 강변으로 내려선다.
많은 비가 온 후라지만 황금빛 모래는 따스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를 밟아본다.
지나온 걸음들이 사진을 찍어놓은 듯 하나씩 각인된다.
발끝을 적실 듯한 섬진강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다.
흔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지만 섬진강은 하류에서 그 힘이 발휘된다.
지리산과 백운산, 두 산의 기운을 한껏 품은 강은 탁한 윗물과는 달리 이 하류에서 더 영롱하다.
몸을 닦고 가다듬는 강 스스로의 정화 능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전 10시 49분 평사리공원에 닿는다.
공원은 강변에 있다.
형제봉을 떠난 패러글라이더들은 이 강변에 안전하게 내려앉는 것으로 비행을 마친다.
조금 밋밋할 듯도 한 래프팅도 구례에서부터 이 일대까지 이어진다.
강변공원과 도로를 경계로 한 지리산 자락엔 악양 평사리 무딤이들이 펼쳐졌다.
좋은 모델이 되어주는 소나무 두 그루와 퇴색된 드라마 세트장, 서희가 거닐던 최참판댁, 고소성으로 오르는 길. 평사리까진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공원에 자리를 잡는다.
아침 겸 점심은 이곳에서 먹기로 한다.
지난밤 야간 이동도 있던 터라 식후 강변의 서늘한 그늘막에서 모처럼 오수를 즐긴다.
여름 어느 날, 우리는 벤치에 널브러진 수박향 은어떼가 되어 꿈속으로, 그 꿈속에서 푸른 섬진강을 유영하며 깊고도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낮 1시 24분이 되어서야 공원을 떠난다.
1시간이나 잠을 잤어도 개운한 건 모르겠다.
오히려 등산화 속으로 들이미는 발이 새삼 불편하고 버겁다.
개치마을을 지나 다시 제방으로 오른다.
이번 제방은 풀들 키가 커서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종아리를 사정없이 긁어댄다.
햇살에 탄 종아리에 날카로운 풀잎의 간섭은 반갑지 않다.
따끔대고 아파 결국은 10분도 걷지 못하고 도로로 내려선다.
강폭이 넓어질수록 길도 넓다.
하동읍이 가까워지면서 강은 바다로 빠질 채비를 서둘렀고, 차량은 그 숫자를 불리며 인도를 걷는 일행들을 서서히 위협하고 있었다.
새삼 ‘섬진강 이대로 영원히 흐르고 싶습니다’라는 표어가 가슴에 깊숙이 들어선다.
이 도로를 4차선으로 확포장한다는 얘기는 한두 해 일이 아니다.
지방선거가 닥칠 때마다 선심 공사격으로 나오는 말인데, 이번엔 심상치가 않다.
굳이 이 차도를 지금보다 넓혀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만약 예정대로 도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섬진강은 부실한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읍내의 분식점에서 김밥 등으로 허기를 달래고 오후 5시 18분 섬진교를 건넌다.
남도대교와 평행선을 그은 채 섬진강 위로 몸을 눕힌 다리. 이 다리를 건너면 광양땅이다.
만약 화개에서 남도대교를 건넌다면 광양 다압을 거쳐 이곳 섬진교까지 올 수 있다.
악양 평사리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반면 다압에는 새하얀 매화로 범벅이 되는 청매실농원과 섬진강의 전설을 상기시키는 섬진나루가 있다.
“고려 우왕 11년(1366) 왜구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침입하자 새까맣게 몰려든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었다.
이를 두려워 한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게 대표적 전설인데, 원래 고운 모래가 많아 가람·사수천·다사강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이 일을 계기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강으로 불렸다고 한다.
남도대교를 건널 것인가 섬진교를 건널 것인가, 둘중 어떤 다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동 악양이냐 광양 다압이냐’로 결정된다.
지형도는 ‘하동’에서 ‘곤양’으로 바뀐다.
‘곤양’을 흐르는 섬진강은 한 뼘도 안 될 정도다.
저녁 6시 861번 지방도로를 따르다 답동마을에서 강변 제방길로 내려선다.
강은 제법 바다를 닮아 있다.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배도, 날갯짓을 서두르는 새도 바다가 멀지 않음을 암시한다.
비닐하우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르신들께 길 저편 마을 이름이 무언지 확인한다.
신송과 금동. 그렇다면 망덕포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제방을 따라가면 8km나 될법한 길. 우선 861번 도로로 빠져 나온다.
바람결에 소금내가 묻어올 만큼 포구는 가까워졌지만 오늘 이 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언덕을 넘어서 오추마을을 지나고 갈대숲 사이 외롭게 선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저녁 8시 52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원 나온 차량에 몸을 싣고 광양시의 찜질방으로 이동이다.
졸지에 섬진강 찜질방 기행이 되었다.
중요한 건 도보여행 마지막 밤이란 것과 강은 그만큼 짧아졌단 사실뿐이다.
일곱째 날, 아동삼거리~진월정~망덕포구 망덕포구에 바다만 남았다
오전 10시 13분, 간밤 걸음을 멈추었던 건물 앞에 도착한다.
포구까지는 여유를 두고 걸어도 1시간쯤. 배낭을 지원차량 트렁크에 싣는다.
무거운 배낭에 길들여진 발바닥은 아무것도 없는 어깨에 적응이 안 되는지 붕붕 허공을 딛는 것처럼 어색하다.
지형도는 진작에 ‘곤양’에서 ‘남해’로 바뀐 터. 최장 발원지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212.3km를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흐르던 섬진강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해맑은 바닷물로 승화하기 직전이다.
봉암산성 입구를 지나 아동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니 망덕포구가 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진월면 삼거리 좌측으로 진입하자 곧 바다다.
횟집이 즐비한 조그만 어촌마을엔 낮게 깔린 잿빛 구름과 짭조름한 소금기가 뒤엉켰다.
‘내 고향 망덕포구 새 우는 마을 울고 웃던 그 시절이 하도 그리워 허둥지둥 봄바람에 찾아왔건만 님은 가고 강 언덕에 물새만 운다.
’ 커다란 회색 돌 위에 강석오가 작사 작곡했다는 망덕포구 노래비가 서있다.
그 강이 하도 그리워 허둥지둥 여름 볕에 찾아왔건만 강은 가고 포구에 바다만 남았다.
천상데미에서 시작한 가느다란 물줄기는 남도의 순박한 마을과 정겨운 산들을 지나 무려 270개가 넘는 물줄기를 더해 이제 마지막 열정을 이곳 망덕포구에 묻고 바다로 떠나버렸다.
강은 이렇게 바다가 되고 일주일을 꼬박 걸어온 우리들의 지친 어깨는 길 위에 뿌려진 추억을 되짚으며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 |
◇ ‘섬진강 따라 걷기’의 마지막 기착지 망덕포구에서 강은 바다가 된다. |
INFORMATION
섬진강 도보 여행
한번에 장기휴가를 낼 수 있다면 전북 진안 데미샘부터 전남 광양 망덕포구까지 일주일 가량 도보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안 될 땐 두 구간에 나눠서 하는 게 적당하다.
두 구간을 나누는 기준은 없다.
서너 구간까지 개개인의 일정과 여건에 맞게 즐기면서 진행할 수도 있겠다.
일시든 구간이든 이틀 남짓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면 굳이 안내가 필요 없을 만큼 길이 눈에 익는다.
산과는 달리 마을과 마을, 길과 길을 잇는 여정이어서 지형도 보는 것도 그만큼 빨라지고, 각자의 컨디션에 맞게 도로를 가로 지르거나 강을 건너는 등 적당히 일정 조절이 가능하다.
본문에 실린 것은 취재진 기준일 뿐이므로 각자의 체력에 맞춰 이동할 것을 권한다.
월간지 특성상 취재진은 6월과 7월에 각각 길을 나섰다.
장마와 태풍 등 비를 만날 가능성이 많을 때이므로 이번 2차 구간에서는 1차 때와는 달리 찜질방을 중심으로 숙박했다.
비가 올 경우엔 야영이나 비박도 여의치 않고, 비를 맞든 땀을 흘리든 찜질방에서라면 마음껏 샤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워를 아예 할 수 없는 산중이라면 그럭저럭 땀 냄새와 그로 인한 찜찜함을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도보여행에선 샤워 욕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인원이 적다면 여관 이용도 가능하지만 상류 쪽과는 달리 하류 쪽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관광지가 발달돼 있어 찜질방 찾기가 조금 수월하다.
넷째 날
전날 미리 전북 순창으로 이동, 영빈모텔에서 1박했다.
순창읍내에서는 영빈모텔이 제일 깨끗한데 6명까지 잘 수 있는 큰방이 있다.
4인 기준 하룻밤 4만원이고, 인원이 추가되면 1인당 5천원씩 더 받는다.
2차 구간 첫날은 지난번 일정을 끝낸 21번 국도(장구목 진입 삼거리)에서 시작된다.
강은 길에서 다소 멀어진다.
지형도를 보고 시목~원촌을 거쳐 24번 국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도로는 공사 중이고 그 옆에 제방이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길과 강줄기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강이 흐르는 대로 길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1차 구간 옥정호 통과처럼 도로를 가로지르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
취재진은 유적교를 건너 무수마을을 통과 유촌으로 나왔다.
유촌마을에는 옛 유촌교가 있어 지형도를 섣불리 흘렸다간 길을 잃는 곤욕을 치른다.
지형도에 나와 있는 유촌교는 허술한 다리가 아닌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유촌대교’다.
작고 낡은 유촌교에서 물줄기 흐르는 방향을 따르면 곧 유촌대교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면 ‘섬진강군민체육공원’이 나오는데 비교적 깨끗한 화장실이 있으므로 급한 볼일은 여기에서 해결한다.
유촌대교를 건너 15분쯤 걸으면 왼쪽으로 제방 입구가 보인다.
아스팔트를 걷는 것보다야 차량 없는 흙길이 훨씬 정겹다.
그러나 제방 역시 강줄기 그대로 나있는 건 아니어서 U자 형태로 휘어져 있다.
30분쯤 걷다가 유풍교를 건너 다시 20분간 제방을 따르면 대풍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순창을 벗어나 남원시 대강면에 닿는다.
강은 커다랗게 굴곡을 이루며 휘돌아 흐르지만 길은 제암~광암을 가로질러 석촌까지 단숨에 내달린다.
아침을 순창의 24시간 김밥전문점에서 부실하게 먹고 온 터라 점심은 오전 11시 48분 광암마을 정자에서 해먹었다.
석촌은 남원 고리봉 등산로 초입 마을이기도 하다.
석촌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730번 지방도로를 30분 가량 걸으면 ‘청계동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행정구역은 전남 곡성군으로 바뀌고 곧 지형도도 ‘순창’에서 ‘남원’으로 넘어간다.
도로변에 ‘경치 좋은 길 시작’이란 안내판이 있을 정도로 길이 좋다.
섬진강을 왼쪽에 둔 이 길은 약 1시간 20분간 이어진다.
취재진은 다음 날 증기기관차를 탈 예정이어서 섬진강기차마을(구 곡성역)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일정을 모두 마친 시간은 저녁 7시 14분. 숙박 장소는 곡성 녹주맥반석찜질방(061-363-7114)으로 정하고 택시(011-601-0513)로 이동했다.
곡성읍에서 찜질방까지 택시비는 5천원. 찜질방 사용료도 1인 5천원. 넷째 날 이동거리는 약 31.5km고 휴식과 식사 포함 총 12시간 걸었다.
지형도는 5만분의1 순창과 남원이다.
다섯째 날
섬진강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는 약 10km다.
평일엔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출발하며, 주말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 출발이 더해져 하루 4번 운행한다.
왕복 요금은 어른 5천원이지만 편도는 3500원으로 비싼 편이다.
무작정 걷는 것도 좋지만 증기기관차를 타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취재진은 오전 11시 기차시간에 여유가 있어 역전 금성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가정역에는 11시 25분에 도착한다.
가정역에 내려 붉은색의 두가교를 건너면 청소년야영장이다.
차량 통행이 많은 17번 국도보다는 이곳의 2차선 지방도로가 걷기에 수월하다 야영장에선 자전거 대여가 가능한데 빌린 자전거는 같은 장소에 반납해야 하므로 일정 진행에는 도움이 안 된다.
사전에 미리 양해를 구해 자전거 편도 운행을 상의해볼 수는 있다(061-362-4186). 섬진강을 우측에 두고 예성교까지 4.2km, 예성교에서 구례까지는 8.3km다.
유곡마을에는 비교적 관리가 잘 된 공중화장실과 정자 뒤쪽으로 유곡나루가 있다.
청소년야영장에서부터 구례구역 앞 섬진강호텔 삼거리까지는 3시간 걸린다.
이후 구례읍을 관통해 피아골 입구 외곡삼거리까지는 19번 국도를 따라 가므로 크게 헷갈릴 길은 없다.
다만 숙박 예정지인 피아골24시한증막(061-783-7775)까지 가려면 부득이 야간 이동을 해야 한다.
취재진은 밤 9시 41분 외곡삼거리에 도착했다.
찜질방은 도로변에 있어 택시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사용료는 비수기엔 1인 6천원, 성수기엔 12,000원씩이다.
액수가 부담 된다면 2km 떨어진 화개에서의 숙박도 괜찮다.
19번 국도의 보행자 도로는 상당히 좁으므로 꼭 좌측통행을 해야 하며 전원 모두 랜턴을 소지해야 한다.
다섯째 날은 기차 탑승 포함 약 39.5km를 걸었고 총 이동 시간은 10시간 30분이다.
지형도는 5만분의1 남원·구례·하동이다.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역시 하동까지 19번 국도를 따르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강줄기는 상류보다 훨씬 넓어서 어디서든 강을 놓치는 일도 드물다.
늦은 아침은 악양 평사리공원에서 먹었다.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막과 벤치와 물이 있어 편하다.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지만 끓여 먹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그 후 하동읍에서 저녁을 겸한 분식을 사먹었다.
하동읍에서는 섬진교를 건너 광양으로 넘어갔다.
섬진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망덕포구 이정표가 보인다.
861번 지방도로인데 답동마을에서 강가 제방으로 내려설 수 있다.
동네 주민들에 의하면 이 제방이 망덕포구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취재진은 일단 금동마을에서 제방을 버리고 도로변으로 나왔다.
밤 8시 52분까지 걷다가 차량 지원을 받아 오추마을쯤에서 광양의 광영스포렉스찜질방(061-793-8051)으로 이동했다.
1인 사용료는 7천원. 차량지원이 없을 경우엔 마지막 날이 여의치 않으므로 일찌감치 일정을 끝내고 광양행 버스를 타는 게 좋다.
주변에 마땅한 민박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섯째 날 이동거리는 약 31.5km고 휴식과 식사 포함 총 13시간 30분쯤 걸었다.
지형도는 5만분의1 하동과 곤양이다.
마지막 일곱째 날은 역시 차량 지원에 힘입어 전날 마친 곳으로 수월하게 이동했다.
망덕포구까지는 약 4km 남았으며 1시간 걸렸다.
망덕포구 이정표가 잘 보이고 무엇보다 강이 바로 옆에 있어 어렵지 않게 이동 가능하다.
망덕에는 횟집이 많으므로 여행의 여독을 싱싱한 회로 풀어보는 것도 좋겠다.
지형도는 5만분의1 남해.정리하자면 섬진강 도보여행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는 총 8장으로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광양만까지 도엽명 갈담·임실·순창·남원·구례·하동·곤양·남해다.
교통
2차 구간을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교통편이 달라지는데 취재진의 경우 순창에서 시작, 지북(혹은 내월)행 버스를 타고 장구목으로 갈리는 삼거리 21번 국도에서 하차했다.
첫차는 아침 6시 40분이고 약 15분 걸린다.
요금은 850원. 그 외의 지역은 지리산과 가까운 곡성·구례·하동 등이어서 서울 용산역(www.korail.go.kr)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거나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www.nambuterminal.co.kr)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마지막 기착지 망덕포구에는 광양까지 33번·34번·107번 등의 버스가 다니며, 광양시 기준 동서울터미널과 부산 등을 오가는 시외버스도 있다.
'도보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버스토리]도심 속 사색과 여유…봄을 깨우는 ‘그 길’ (0) | 2007.03.24 |
---|---|
새 봄 꽃길에서 만끽하세요” (0) | 2007.03.16 |
섬진강 따라 걷기1/데미샘~마령~사선대~옥정호~장구목 (0) | 2007.03.12 |
3월20일 2차 서울 경계 도보-날짜 변경했습니다. (0) | 2007.03.08 |
3월4일(일) 서울시 경계 릴레이 도보 (0) | 2007.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