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 9.10/생 장피드포르 (2) 아, 피레네-난 그대를 얕봤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를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 생 장피드포르(St. jean-pied-de-port) …" 비음이 잔뜩 섞인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못 알아듣는 프랑스어지만 역 이름만큼은 화살처럼 귓전에 날아와 꽂혔다. 꿈속에서 수없이 걸었던 그 길이 시작되는 곳,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외던 곳! 그곳에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키 큰 배낭과 등산복으로 완전무장한 이들은 역을 빠져나오자 도마뱀처럼 긴 행렬을 이루었다. 뒤만 따라가면 순례자에게 도보여행 증명서(Credencial del Peregrino)를 발급해 준다는 '산티아고협회'를 찾을 수 있겠지 안도하면서도, 이 많은 사람들과 여행 내내 줄지어서 행군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이게 얼마나 기우였는지는 다음날 즉각 입증되었지만). 이끼 낀 성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본 마을 정경은 천국 입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성문 주변의 작고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하는 순례자들, 바스크족 특산물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의 표정은 생기에 넘쳤고 여유로웠다. 이곳에선 혹 시계조차 느릿느릿 가는 건 아닐까. 산티아고 길을 가슴에 품게 된 건 '청춘을 바친' 직장을 그만둔 2003년 봄. 스무해 넘게 해온 기자 일을 접은 때이기도 했다. 긴 세월 언론사 특유의 살인적인 취재 경쟁과 '악마의 빚 독촉'보다 무서운 원고 마감에 시달리면서 술과 담배에 의존했던 탓에 나는 망가진 기계 같았다. 오후만 되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편두통에 시달렸고,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푹 퍼지곤 했다. 해마다 정기 이자 붙듯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날 몰라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몸무게와 반비례해 마음은 날로 메말라 갔다. 이렇게 살다간 책상 앞에서 쓰러지거나 회복 못 할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일단 담배부터 끊었고,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회사까지 '끊었다'. 죽는 건 면했지만 대신 허무감과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몸 바쳐 일해온 직장, 가족보다 더 아꼈던 직장 후배들이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고 즐겁게 지내자 상실감마저 느꼈다. 난 다 파먹은 김장독처럼 텅 비어 군내만 풍기는데…. 침대를 벗삼아 지내다가 함께 사는 친정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 해 집을 나섰다.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버스 한 정거장 거리도 걷기 귀찮아 택시를 타고, 직원 등반대회 때 산 중턱에서 헬리콥터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던 내가 걷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중독자의 우울증은 서서히 걷혀갔다. 걷는 데 익숙해진 뒤에는 가시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다. 종류를 불문하고 차들은 걷는 이에게 턱없이 적대적이었고, 길들은 걷다 보면 맥없이 끝나곤 했다. 길과 길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끊어져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럴 즈음 그녀의 책-아쉽게도 이름도 책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다. 여고 졸업 뒤 일찍 결혼해 남편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 간 50대 여성이 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긴 길'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차량의 위협적인 경적음 없이, 도로의 절망적인 끊김 없이 한 달 내내 걸을 수 있는 길! 홀로 길 떠난 이들이 끝까지 혼자일 수 있지만, 맘만 먹으면 글로벌 패밀리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길! 예전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다리가 질질 끌릴 즈음 순례자 증명서만 내밀면 값싼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집단 숙소)'에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길! 책장을 덮는 순간 난 혼잣말로 외쳤다. "꼭 이 길을 걷고 말 거야." '산티아고 가는 길'이 파올로 코엘류('순례자''연금술사'의 저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의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 열망은 더 깊고 간절해졌다. 막막하기만 한 내 삶의 후반전에 어떤 암시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 강화도 들길을 걷고 북한산을 오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중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을 걷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신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여행작가 김남희가 올리는 '산티아고 일기'라는 연재물(이 기행문은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 2'라는 책으로 엮였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러워 배가 다 아팠지만 그녀의 여행기를 맨 먼저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한동안은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종이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갈 데 없는 '낀세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속도감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젊고 열정적인 후배들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언제나 의욕적이고 발랄했지만 난 알아듣기 힘든 신기술 용어와 작동하지 않는 첨단기기 앞에서 점점 주눅 들었다. 50, 60대처럼 아날로그적인 삶을 끝내 고집할 수도, 30, 40대 초반처럼 디지털적인 삶에 쉽게 편승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정쩡한 나이…. 가파른 속도는 도처에서 날 위협했다. 요란한 굉음을 동반한 일년여의 공사 끝에 동네 사람들이 무.상추나 심던 아파트 앞 공터에 10층짜리 오피스텔 두 동이 세워지더니 상가에 들어선 가게들은 한밤중까지 네온사인 간판을 켜놓고 노래반주기를 틀어놔 나만의 시간인 밤마저 빼앗아갔다. 더 늦기 전에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영어도 못 하는 아줌마가 혼자서…'.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일본을 경유해 파리를 거쳐 고속철 타고 비욘으로 가 다시 지방선으로 갈아탄 끝에 산티아고 여정의 출발점에 다다른 때는 햇빛이 너무도 눈부신 9월 10일 오후였다. 증명서를 발급받고 자원봉사자가 일러준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 뒤 미리 점찍어 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피레네 발치에 조붓이 엎드린 마을이 노을에 붉게 물드는 광경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다음날 산 위에서 닥칠 일을 까맣게 모른 채.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2) 아, 피레네- 그대를 얕봤네 .....9.11~12/운토~론세발레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피레네를 눈앞에 두고서도 '피레네를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프랑스길'을 걷는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생 장피드포르에서 론세발레스까지 걸어서 국경을 넘는 사람과 피레네를 우회해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 까짓것 북한산 예행연습도 몇 번 해봤겠다, 걸어서 넘는 쪽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엄청난 성량의 코골이로 밤새 괴롭히던 미국 여자 둘은 신새벽부터 짐을 챙겨 길을 떠났고, 나는 짐 일부를 덜어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부치려 우체국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산티아고 우체국은 이렇게 받은 짐을 순례자가 도착할 때까지 최장 두 달간 무료 보관해 준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 아줌마와 영어를 도통 못 알아듣는 우체국 직원이 이 어려운 숙제를 해결한 시각은 오전 11시가 다 돼서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새벽에 떠나면 2, 3시쯤 도착한다고 했으니 해질 무렵엔 하산할 수 있겠지' 하고 산으로 향했다. 가끔씩 자전거족들이 "부엔 카미노(좋은 순례길을 빌어주는 인사말)"라고 외치면서 지나쳤지만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생초보 산꾼은 이런 상황이 내포한 위험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전문 산악인의 조언대로 한 시간 간격으로 등산화까지 다 벗고 휴식을 취했다. 미풍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고, 초록은 멀고 가까움에 따라 빛깔을 달리했다. 품 넓은 한라산을 닮은 피레네는 숨소리조차 의식될 만큼 적막했다. 라디오를 시끄럽게 틀어대는 등산객을 피해 자주 올랐던 강화읍 양서면 뒷산마냥.
호젓한 산중에 갑자기 집이 나타나고 순례자들이 눈에 띄었다. 산중 유일의 알베르게, 오리존이란다. 산 아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테라스에서 음료수나 와인을 마시는 그들 옆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잠깐 쉬었다가 오늘 안에 론세발레스까지 간다고 했더니, 옆자리의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러기엔 너무 늦었단다. 아니, 해가 중천에 걸려 있고 기운이 아직 넘치는데, 웬말인가! 서툰 영어로 우기는데 맞은편 테이블에서 독서를 즐기던 남자가 가세했다. 벌써 오후 4시인데 아직도 17㎞나 남았으니 더 이상 등반은 무리란다. 이 덜렁대는 아줌마가 그저 산 하나를 넘는다고만 생각했지, 그 산길이 27㎞나 된다는 사실을 흘려넘긴 것이다. 순례자들의 강권에 산장에서 묵기로 겨우 마음을 돌려먹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베르게 운영자가 침대가 없다면서 "운토로 가라"고 한다. 운토? 운토가 대체 뭔데? 이곳에서 3㎞ 떨어진 피레네의 마지막 마을이란다. 되돌아가야 한다니! 이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보기 딱했던지 캐나다에서 왔다는 두 남자가 자동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자원했다. 운토는 외딴 농가 서너 채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초미니 마을. 그들 농가는 잠자리에 저녁과 아침을 곁들인 민박(하루 25유로)을 치고 있었다. 5유로, 7유로짜리 알베르게에 견주면 엄청난 가격이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숙소는 왕년에 헛간이나 마구간으로 쓰였음직한 가건물이었다. 한데 양말과 속옷을 빨아 마당 빨랫줄에 좌악 널어놓고 느긋하게 책을 펼쳐든 순간, '두두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숙소 안으로 몸을 피하자마자 바깥에서는 번쩍번쩍 우르르 쾅쾅, 천둥 벼락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쏟아지는 비, 비, 비…. 여주인은 자주 겪는 일인 듯 심상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문단속을 하고 갔다. 산장에서 차를 마실 때만 해도 얼마나 햇살이 찬란했던가. 민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도 더러 있었으니. 만일 산장에서 순례자들이 생면부지의 나를 굳이 돌려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피레네 깊은 산중에서 천둥 소리에 떨고 장대비에 젖어 있을 것이다. 아아 피레네여! 당신을 너무 우습게 알았다, 제발 용서해 다오. 헛간 침대에 엎드려 자연을 우습게 여긴 무지와 오만을 뉘우쳤다.
다음날 아침, 골안개가 피어오르는 피레네는 씻은 듯 푸르렀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종종 보이던 전반부와는 달리, 중반 이후의 피레네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너른 도로와 양들이 '쩔그렁 쩔그렁' 목방울 소리를 내며 풀을 뜯는 평평한 목초지뿐이었다. 비 피할 나무 한 그루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산길을 걷자니 '오리존의 기사들'이 새삼 고마웠다. 성모상이 있는 산중턱에 이르렀다. 사방으로 겹겹이 펼쳐진 피레네 산군을 처연한 눈길로 굽어보는 성모마리아의 발치에는 돌멩이로 꼬옥 눌러놓은 가족 사진과 소망이 적힌 카드들이 수북했다. 간절한 소망을 빌기 전에 당장의 허기를 면하려고 볶은 곡식을 꺼내 씹어 먹었다. 예상보다 긴 산행 때문에 준비한 비상식이 다 바닥이 나고 말았다. 론세발레스 3.2㎞. 마지막 표지판이 나온 뒤에도 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낭의 무게는 갈수록 어깨를 파고들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 푸른 초장도 하루 이틀, 길고 외로운 산행에 지쳐갔다. 오후 6시. 숲 사이로 뾰족탑이 머리를 내밀더니 이어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발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 낯설지만 근사했다. 북한 땅만 열려 있다면 우리도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까지도 걸어서 갈 텐데. 외부로 향한 창이 닫히면 마음도 그만큼 가둬지는 법.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국경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구촌 시대에 치명적인 결손이 아닐 수 없다. 침대가 열댓 개밖에 없는 별장 같은 오리존과는 달리, 이곳 알베르게는 100명 넘는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서 마치 군대 막사 같았다. 증명서에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은 뒤 근처 바에 들렀다. 국경 마을 특유의 달뜬 분위기가 감도는 바에서 인상 좋은 바텐더가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지? 일본? 중국?" "아니, 코리아." "북쪽? 남쪽?" "남쪽." 분단의 현실은 안팎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옥죈다. 그러나 '순례자 메뉴'(7유로)로 나온 바스크 지방 특유의 맛있는 생선 요리와 감미로운 와인에 심신의 고달픔이 씻긴 듯 날아가니, 난 역시 형이하학 체질인가 보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
보물처럼 숨어있는 길잡이 `산티아고 사인`
찾는 데 집중하다 보니 떠돌던 마음 한 곳에
중세풍의 아름다운 돌다리로 유명한 주비리(Zubiri). 피레네에서 나를 구해준 '오리존의 기사들'과 이곳 알베르게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운토로 되돌아간 내가 피레네를 넘었는지 궁금했다고 뛸 듯이 반가워하면서 자기 팀과 저녁식사를 함께하자 했다.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과 프랑스풍이 강해 '작은 프랑스'로 불리는 퀘벡 사람들이 자연스레 친해져 함께 다니는 모양이었다. 순례자들은 팀을 이루어 오는 경우가 많다. 남편과 부인, 시누이와 올케, 오랜 동네 친구, 처남과 매부, 형제와 자매, 직장 동료, 애인 사이, 고교 동창생,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등. 나 같은 솔로 순례객은 열에 한 둘, 게다가 동양인은 더욱 보기 드문 존재다. 영어로 시작된 대화는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리드미컬하고 빠른 프랑스말로 옮겨갔고, 거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 끼여 외롭고 서글펐다.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낯선 땅, 낯선 사람들 틈에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침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단해서 녹초가 된 순례자들은 곳곳에서 코를 골아댄다. 한국에서 떠날 준비를 하며 맨 먼저 장만했던 고성능 귀마개는 배낭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새벽녘. 침대에서 뒤척이느니 차라리 길을 나서자, 걷다 보면 동이 트겠지. 어둠에 싸인 알베르게를 살짝 빠져나왔다. 예측은 빗나갔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훤해지기는커녕 더 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시커먼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고, 발밑엔 물이 찰랑거렸다. 후배가 사준 헤드랜턴마저 산티아고로 부쳐버렸기에(나의 단견을 원망하는 수밖에!) 지독한 어둠을 뚫을 방법이 묘연했다. 담배를 끊은 내겐 라이터마저 없다. 더 갈까, 되돌아갈까? 망설이는데 맞은편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람이다! 와락 겁이 났다. "카미노?" 그쪽에서 팽팽한 정적을 깨고 말을 건네왔다. 순례자냐고 묻는 걸 보면 강도나 치한은 아니겠지. 야광등 불빛에 드러난 그는 등산복 차림의 잘 생긴 청년이었다. 선량해 뵈는 청년, 멕시코에서 온 펠리페(사진)란다. 밤눈이 워낙 어두워 산티아고 사인을 못 찾겠단다. 랜턴은 있지만 야맹증인 남자와 시력은 좋지만 랜턴이 없는 여자. 천생연분이랄 수밖에. 힘을 합쳐 길을 찾기로 했다.
[week&쉼] 어! 코엘료 `연금술사` 작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중앙일보]
촬영차 나온 그와 사진 찍고 대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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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속끓였나 아라리요
# "힘내라 수키" 큰 ~ 편지를 받다 그 많던 포도밭이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남도길 같은 황톳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땡볕이 내리쬐고 진흙이 푸석푸석 날리는, 그러나 한없이 정겨운 그런 길. 하루, 이틀, 사흘…. 비슷한 풍경과 여정이 되풀이되면서 피부는 점점 구릿빛을 띠고, 몸의 살들은 어디론가 떠나갔다. 가난한 후배가 큰맘 먹고 사준 등산용 반바지가 갈수록 헐렁해진다. 체중이 가벼워질수록 몸은 더 오래 걷기를 원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등 뒤에서 젊은 여자가 날 불러세웠다. 자기는 아이슬랜드에서 온 모니카란다. 혹시 당신 이름이 수키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저쪽에 당신에게 온 '큰 편지(big mail)'가 있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 같단다. 길에서 편지? 그것도 큰 편지? 그녀는 지나온 길을 가리킨다. 'Courge Sooki(힘내라 수키)'라고 막대기로 큼지막하게 휘갈긴 글씨가 땅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쳐 왔구나! 누군지 알 만했다. 아까 풀밭에서 후배가 준 푸른빛 숄을 식탁보 대용으로 깔고 바게트에 참치 통조림을 얹어 점심을 먹는데, 한 순례자가 다가와 함께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와이 낫(Why not)! 섬세한 프로필의 그 남자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왔다는데, 와인의 고장 출신답게 새끼오징어 통조림을 빵 위에 얹은 뒤 수통에서 경건하게 붉은 와인을 따랐다. 내게도 권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금주 중이라고 사양했다. 길고 우아한 식사를 끝낸 그는 먼저 길을 떠났다. 걷다가 길이 지루했던지 내게도 힘을 내라고 격려 메일을 날린 것이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가슴에 따뜻한 물결이 밀려왔다. 졸지에 배낭 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산티아고 길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다 낭만적이고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다. 에스파냐 고딕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부르고스(Burgos) 대성당을 보러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9월 24일 아침. 알베르게를 나설 무렵 시작된 비바람은 산 하나를 다 넘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몸도 젖고, 배낭도 젖고, 마음도 젖는다. 정상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마저 비에 젖어 운다. 하산길은 더 지루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를 즈음, 비 젖은 마을이 흐릿하게 그 윤곽을 드러냈다. 유일한 바에 들어가 보니 앞서 하산한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일손 달리는 주인 여자를 거들어주면서 기다린 끝에 뜨거운 코코아와 좋아하는 '또르티야(달걀에 감자나 햄을 넣어서 도톰하게 쪄낸 요리)'를 먹으니 다시 기운이 샘솟는다.
이를 악물고 시내 한복판을 관통할 즈음, 헛것을 보았나 의심이 갈 만큼 거대하고도 섬세한 프로필의 부르고스 대성당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다. 스페인에서 셋째로 큰 이 성당을 두고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체는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고 여성의 몸을 꾸미는 보석처럼 정교하다'고, 당시 국왕 펠리페 2세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사의 솜씨'라고 했다던가.
그러나 부르고스 대성당은 비판적 시선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완벽한 걸작품에 무슨 찬사를 덧붙일 것이며, 냉정한 사회적 비평을 가할 것인가.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은 대성당을 구경하는 데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는데 순례자들에게는 관람료를 2유로밖에 안 받는다. 순례자가 봉이 아니라 특혜를 누리는 산티아고 길! 부르고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메세타(대평원) 지역이다. 어떤 이들은 산티아고 여정 중 가장 지루한 길로, 어떤 이들은 가장 매력적인 길로 기억하는 묘한 곳. 한 가지 분명한 건 명상하기 좋은 길이라는 점이다. 한눈을 팔 만한 근사한 경치가 없고, 갈래길이 많은 산길 들길처럼 길을 잘못 들 염려가 없으니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기에 그지없이 좋은 조건이다(혹자는 메세타 자체에 명상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도 한다). 마음의 도마 위에 생각을 한번씩 올려놓아 본다. 미워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일들,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강물 위에 띄운 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그리 분노하고 마음을 상하고 애를 끓였을까. 대체 무엇을 위해 뜨는 해와 지는 노을 한번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살았던 걸까. 너무 바쁜 나머지 정작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온 내가 가엽고 불쌍했다.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노래가 들어앉는가. 언제부터인가,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로 고문한다'고 소문난 음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체면 구길 일도, 눈치볼 이유도 없었다. 레퍼토리는 발라드, 트로트, 동요를 지나 구전 민요로 이어졌다. '진주난봉가'에서 '아리랑', '새야 새야 파랑새야'까지. 뜻밖에 길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에 창자를 쥐어짜며 온몸으로 노래했다(소질이 있었다면 그때 득음했을는지도 모른다). "브라보(Bravo)!" 난데없는 박수소리와 함께 순례자가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걸음 빠른 서양 남자가 따라잡은 것이다. 핀란드에서 왔다는 남자는 "아름답지만 무척 슬픈 노래 같다. 어느 나라 노래냐"고 묻는다. 노래에 깃든 정조(情調)가 음치를 통해서도 전달되다니, 노래의 힘은 역시 위대하다. 노래에 의지하면서 해바라기조차 고개 숙인 적막한 대평원을 넘던 내가 술 앞에서 무너진 것은, 얄궂게도 처음으로 30㎞의 벽을 넘어선 날이었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바로잡습니다 1월 5일자 '서명숙의 산티아고 순례기' 4회분 중 '왼쪽 수도꼭지에선 붉은 포도주, 오른쪽 수도꼭지에선 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을 '…이라체 포도주 공장'으로 고칩니다. |
에스파뇰은 그래서 행복하나니
'로그로뇨의 결의'를 깨고 술을 다시 입에 댄 날은 하루 41㎞라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은 기록을 세운 날이기도 했다. 아침 6시 이전엔 나갈 수 없다는 알베르게의 규칙을 어기고 새벽 4시에 길을 떠나(순전히 시간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사아군에 이르른 시간은 땅거미가 질 무렵. 일요일에 서는 새벽시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알베르게로 직행했다. 장시간을 바게트와 과일로 때운 터라 사자라도 한입에 삼킬 듯 배가 고팠다. 알베르게 식당에 들렀더니 로그로뇨 번개모임(1월 12일자 참조)의 일원이었던 벤과 그의 일행이 "수키!" 하며 반가워한다. 그들 앞에 놓인 먹음직한 샐러드가 더 눈에 들어왔다. 누가 줬다면서 내게도 권한다. 배고프다고 얼굴에 써 있었나? 벤에게 샐러드를 나눠줬다는 프랑스 여자 프란체스카는 남자친구가 만든 리조토까지 들고와 권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누군가가 "비노(와인)도 한 잔" 하며 따라준다. 열흘 공든 탑이 단번에 무너져내렸다. 후회하기엔 오랜만에 마신 포도주맛이 너무도 황홀했다(술 좋아하는 사람의 자기합리화!). '마의 벽' 40㎞를 넘어선 뒤부터 예기치 못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사아군을 벗어나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밋밋하고 평탄한 길을 지나는데 문득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걸까' 회의가 엄습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왔는데 고국에서 추방당한 사람마냥 처량하게 느껴졌다. 걷기에 이력이 붙고, 어젯밤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는데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사아군을 벗어나자마자 쏟아진 장대비를 피하느라 버려진 병원 건물 처마 밑에서 한참을 옹숭그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느 순례자의 돌무덤 앞에서 길을 걷다가 그 길에서 죽어간 이를 추념(追念)한 때문일까. 비는 얼마전부터 멎었는데도 마음의 벌판에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그러던 중에 발길을 멈춘 작은 마을의 지독히도 어두침침한 바에서였다. 대낮인데도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둘러보니 순례자(복장과 배낭만 보면 금세 알 수 있다)는 나 혼자, 나머지는 모두 마을 사람들이었다. 추운 마음을 데우려고 '카페 콘라체 그란데('밀크커피 큰 잔'이란 뜻)를 시켰다. 울적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저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내게 손동작으로 무언가를 먹어보라고 자꾸 권한다. 조그맣게 자른 식빵에 올리브에 절인 생선과 피멘토(고추)절임을 얹은 안주였다. 여전히 머뭇거리자, 돈을 안 내도 되는 공짜 안주(스페인 바 중에는 공짜 안주를 내놓는 곳이 더러 있다)라고 손동작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계속 모른 체하기도 미안해서 한 개 집어먹은 뒤 맛있다(물론 손동작으로)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사람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와인을 시킨 적이 없는지라 손사래를 치자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자기가 낸단다. 망설이다가 한 모금 마시니 바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공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이방인의 우울증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들의 친절이 명약이었던 걸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그들을 보노라면 800㎞를 걷는 순례자들보다도, 그 길을 지키고 사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페레그레노(순례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그러나 즐기면서 걷는 삶의 순례자들!
레온(leon), 웅장한 고딕식 대성당으로 유명한 레온 지방의 주도(州都). 이 도시는 산티아고 순례자라면 예외없이 하룻밤 묵어가는 곳이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호텔이나 호스탈에서 2~3일 묵으며 모처럼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한꺼번에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들은 레온에서 일단 여정을 갈무리한 뒤에, 다음번엔 레온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순례길의 중요한 거점인 셈이다.
대성당을 둘러보고 난 뒤 도시 외곽의 알베르게로 돌아가려는데, 길치 아니랄까봐 왔던 길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는 수밖에. 내게 붙들린 에스파뇰들은 한결같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에게 이 멋진(!) 과제가 떨어져 무척 기쁘다는 표정으로, 손짓 발짓 몸짓을 총동원해서 가르쳐 주었다. 여러 사람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어렵사리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옆 침대 남자가 반갑게 맞이한다. 여러 번 같은 숙소에서 만나 낯이 익은 영국인 로버트다. 그는 30년 넘게 군생활을 하다가 대령으로 전역한 퇴역 장교. 아직도 엄격한 규율 아래 한평생 살아온 군인의 얼굴이 남아 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에스파뇰이 한결같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가 화제에 올랐다. 군인 출신답게 그의 결론은 단순 명쾌했다. "시에스타 덕분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니까 해피할 수밖에." 점심시간에 관공서와 상점의 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는 외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힘들지만 더 나아가 순례자에게는 매우 고약한 관습이다. 산과 들을 지나 가까스로 마을에 당도해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도 사고 장을 보려고 해도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불가능하다. 상점에 아무리 예쁜 물건이 많고 풍성한 식재료가 있으면 뭐하나?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흔히들 스페인 사람과 한국 사람은 닮은 데가 많다고 한다. 종교적이면서도 현세지향적이고 감정이 풍부하고 신명이 많고 가부장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체험도 비슷해서 스페인 역시 이민족에 오랜 기간 침탈을 당했고,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운 내전 후에 프랑코 총통 치하에서 40년 넘는 장기독재를 경험했다. 국민소득이나 생활 수준도 엇비슷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삶의 속도라는 측면에서는 극히 대조적이다. 스페인은 문명화된 산업국가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슬로 라이프'를, 한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숨가쁜 '패스트 라이프'를 구가한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
week&쉼] 달밤 행군 [중앙일보]
"내 다시는 알베르게에 들어오지 않을 테다." 침낭 안에서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그럼 호텔? 호스탈? 돈도 돈이려니와 썩 내키지 않는다. 차라리 밤중에도 걷는 건 어떨까? 이 순례길의 선구자 야고보 성인도 밤을 틈타 먼 길을 좁혔는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님네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하는 깜깜한 밤길을 걸었잖은가. 순례 초기의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10월 15일 정오에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사흘밖에 안 남은 현재, 남은 거리는 145㎞. 이제까지의 속도대로라면 닷새는 걸린다. 야간에도 걷는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티아고 길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길'임은 지난 한 달여의 경험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해보자! 아님 말고. 순례자 대부분이 묵어가는 아름다운 도시 시리아(Sirria)를 눈물을 머금고 통과한 뒤, 어느 작은 마을 어귀의 민박집 겸 레스토랑에서 야간행군을 앞둔 영양 보충 차원에서 '순례자 메뉴'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옆에서 식사하는 베네수엘라 청년 넷이 침대가 여섯 개인 민박집을 통째로 빌렸다고 떠든다. 자고 갈까, 하는 미련과 어둠 속에서 걸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해는 어느덧 산등성이 저편으로 꼴깍 넘어가고 유혹적인 푸른빛이 대지를 휘감을 즈음, 더 늦기 전에 배낭을 둘러멨다. 무슨 일이 기다릴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열정과 떨림! 얼마나 걸었을까. '산티아고까지 100㎞'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아, 걷다 보니 이런 순간도 찾아오는구나! 앞서간 이들도 비슷한 심경이었나 보다. 지니고 있던 손수건, 지팡이, 모자, 사연 담긴 카드 따위를 돌 위에 얹어놓았다. 심지어 신던 등산화를 벗어놓은 이도 있다(뭘 신고 가려는 거지?). 거기까지는 좋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산티아고 사인'을 놓치고 말았다. 금세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덤불숲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리저리 내달려 봐도 잃어버린 사인을 찾을 길이 없다. 마을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동안의 경험칙에 비추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그 자리에 정지하느니만 못하다. 엎어진 김에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다시 찾자. 날은 그다지 춥지 않으니 견딜 수 있겠지. 돌담으로 둘러쳐진 풀밭에 들어가 침낭을 깔고 누웠다. 산악전문가 백승기 선배를 쫓아 비박이라도 한번 연습하고 올 것을,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침낭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빈 공간이 없을 만큼 별이 빼곡했다. 별 보면서 자는 게 얼마 만인가. 어린 시절 서귀포 천지연 근처 매일시장통에 살 적에 평상 위에 엄마 무릎 베고 누우면 이마 위로 별이 쏟아졌더랬는데. 매트리스도 깔지 않은 터라 시간이 흐를수록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배낭을 뒤져 옷을 죄다 꺼내 입었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성질 더러운 사람은 이래저래 고생이라니까, 후회막급이었다. 이를 덜덜 떨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져내려 풋잠마저 깨고 말았다. 고개를 빼 보니 눈부신 반달이 날 향해 빙그레 웃는 게 아닌가! 밝은 달빛에 비추인 침낭 주변은 밤새 내린 이슬로 온통 물덤벙이었다. 더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달빛에 의지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신의 무기는 인간의 것보다 역시 우월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노란 화살표는 사인을 놓쳐 허둥대던 그 지점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변전소 담벼락 귀퉁이에 숨어 있었다. # 둘째 날 카사노바 마을에서 경을 치다
[week&] 마침내…꿈꾸는 자가 아니라 떠나는 자만이 목적지에 이르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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