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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샨티아고 순례기

코리아트레일 2007. 3. 24. 22:37
[week&쉼] 서명숙의 인생 하프타임 산티아고 순례기 [중앙일보]
제발 … 이 길 800km 다 걷고 나면 내 인생길도 바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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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20여 년. 몸은 불고 마음은 메말라 갔다. 그러다 알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 급하고, 무섭고, 요란한 속도의 도시를 떠나 그곳에 가기로 했다. 여자 나이 마흔아홉. 걸으며 발견한 인생의 단맛 진맛.


글 싣는 순서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 9.10/생 장피드포르

(2) 아, 피레네-난 그대를 얕봤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를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마침내 출발점이다

"… 생 장피드포르(St. jean-pied-de-port) …"

비음이 잔뜩 섞인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못 알아듣는 프랑스어지만 역 이름만큼은 화살처럼 귓전에 날아와 꽂혔다. 꿈속에서 수없이 걸었던 그 길이 시작되는 곳,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외던 곳! 그곳에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키 큰 배낭과 등산복으로 완전무장한 이들은 역을 빠져나오자 도마뱀처럼 긴 행렬을 이루었다. 뒤만 따라가면 순례자에게 도보여행 증명서(Credencial del Peregrino)를 발급해 준다는 '산티아고협회'를 찾을 수 있겠지 안도하면서도, 이 많은 사람들과 여행 내내 줄지어서 행군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이게 얼마나 기우였는지는 다음날 즉각 입증되었지만).

이끼 낀 성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본 마을 정경은 천국 입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성문 주변의 작고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하는 순례자들, 바스크족 특산물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의 표정은 생기에 넘쳤고 여유로웠다. 이곳에선 혹 시계조차 느릿느릿 가는 건 아닐까.

담배 … 회사 … 다 끊었다

산티아고 길을 가슴에 품게 된 건 '청춘을 바친' 직장을 그만둔 2003년 봄. 스무해 넘게 해온 기자 일을 접은 때이기도 했다. 긴 세월 언론사 특유의 살인적인 취재 경쟁과 '악마의 빚 독촉'보다 무서운 원고 마감에 시달리면서 술과 담배에 의존했던 탓에 나는 망가진 기계 같았다.

오후만 되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편두통에 시달렸고,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푹 퍼지곤 했다. 해마다 정기 이자 붙듯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날 몰라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몸무게와 반비례해 마음은 날로 메말라 갔다. 이렇게 살다간 책상 앞에서 쓰러지거나 회복 못 할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일단 담배부터 끊었고,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회사까지 '끊었다'. 죽는 건 면했지만 대신 허무감과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몸 바쳐 일해온 직장, 가족보다 더 아꼈던 직장 후배들이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고 즐겁게 지내자 상실감마저 느꼈다. 난 다 파먹은 김장독처럼 텅 비어 군내만 풍기는데….

침대를 벗삼아 지내다가 함께 사는 친정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 해 집을 나섰다.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버스 한 정거장 거리도 걷기 귀찮아 택시를 타고, 직원 등반대회 때 산 중턱에서 헬리콥터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던 내가 걷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중독자의 우울증은 서서히 걷혀갔다. 걷는 데 익숙해진 뒤에는 가시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다. 종류를 불문하고 차들은 걷는 이에게 턱없이 적대적이었고, 길들은 걷다 보면 맥없이 끝나곤 했다. 길과 길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끊어져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럴 즈음 그녀의 책-아쉽게도 이름도 책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다. 여고 졸업 뒤 일찍 결혼해 남편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 간 50대 여성이 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긴 길'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차량의 위협적인 경적음 없이, 도로의 절망적인 끊김 없이 한 달 내내 걸을 수 있는 길! 홀로 길 떠난 이들이 끝까지 혼자일 수 있지만, 맘만 먹으면 글로벌 패밀리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길! 예전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다리가 질질 끌릴 즈음 순례자 증명서만 내밀면 값싼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집단 숙소)'에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길!

책장을 덮는 순간 난 혼잣말로 외쳤다. "꼭 이 길을 걷고 말 거야."

'산티아고 가는 길'이 파올로 코엘류('순례자''연금술사'의 저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의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 열망은 더 깊고 간절해졌다. 막막하기만 한 내 삶의 후반전에 어떤 암시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

광속의 세상 … 질렸 다

강화도 들길을 걷고 북한산을 오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중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을 걷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신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여행작가 김남희가 올리는 '산티아고 일기'라는 연재물(이 기행문은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 2'라는 책으로 엮였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러워 배가 다 아팠지만 그녀의 여행기를 맨 먼저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한동안은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종이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갈 데 없는 '낀세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속도감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젊고 열정적인 후배들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언제나 의욕적이고 발랄했지만 난 알아듣기 힘든 신기술 용어와 작동하지 않는 첨단기기 앞에서 점점 주눅 들었다. 50, 60대처럼 아날로그적인 삶을 끝내 고집할 수도, 30, 40대 초반처럼 디지털적인 삶에 쉽게 편승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정쩡한 나이….

가파른 속도는 도처에서 날 위협했다. 요란한 굉음을 동반한 일년여의 공사 끝에 동네 사람들이 무.상추나 심던 아파트 앞 공터에 10층짜리 오피스텔 두 동이 세워지더니 상가에 들어선 가게들은 한밤중까지 네온사인 간판을 켜놓고 노래반주기를 틀어놔 나만의 시간인 밤마저 빼앗아갔다. 더 늦기 전에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영어도 못 하는 아줌마가 혼자서…'.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일본을 경유해 파리를 거쳐 고속철 타고 비욘으로 가 다시 지방선으로 갈아탄 끝에 산티아고 여정의 출발점에 다다른 때는 햇빛이 너무도 눈부신 9월 10일 오후였다.

증명서를 발급받고 자원봉사자가 일러준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 뒤 미리 점찍어 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피레네 발치에 조붓이 엎드린 마을이 노을에 붉게 물드는 광경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다음날 산 위에서 닥칠 일을 까맣게 모른 채.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쉼] 서명숙의 인생 하프타임 산티아고 순례기 [중앙일보]
` 부엔 카미노` 그러나 … 생초보 산꾼, 장대비 속 피레네를 헤맬 뻔했으니
피레네 산맥의 안개가 걷히는 모습. [여행 작가 김남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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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2) 아, 피레네- 그대를 얕봤네

.....9.11~12/운토~론세발레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석.
# 출발은 가뿐했다

피레네를 눈앞에 두고서도 '피레네를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프랑스길'을 걷는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생 장피드포르에서 론세발레스까지 걸어서 국경을 넘는 사람과 피레네를 우회해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 까짓것 북한산 예행연습도 몇 번 해봤겠다, 걸어서 넘는 쪽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엄청난 성량의 코골이로 밤새 괴롭히던 미국 여자 둘은 신새벽부터 짐을 챙겨 길을 떠났고, 나는 짐 일부를 덜어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부치려 우체국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산티아고 우체국은 이렇게 받은 짐을 순례자가 도착할 때까지 최장 두 달간 무료 보관해 준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 아줌마와 영어를 도통 못 알아듣는 우체국 직원이 이 어려운 숙제를 해결한 시각은 오전 11시가 다 돼서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새벽에 떠나면 2, 3시쯤 도착한다고 했으니 해질 무렵엔 하산할 수 있겠지' 하고 산으로 향했다. 가끔씩 자전거족들이 "부엔 카미노(좋은 순례길을 빌어주는 인사말)"라고 외치면서 지나쳤지만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생초보 산꾼은 이런 상황이 내포한 위험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전문 산악인의 조언대로 한 시간 간격으로 등산화까지 다 벗고 휴식을 취했다. 미풍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고, 초록은 멀고 가까움에 따라 빛깔을 달리했다. 품 넓은 한라산을 닮은 피레네는 숨소리조차 의식될 만큼 적막했다. 라디오를 시끄럽게 틀어대는 등산객을 피해 자주 올랐던 강화읍 양서면 뒷산마냥.


27km에 이르는 피레네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샘.
# 피레네, 나를 용서하라

호젓한 산중에 갑자기 집이 나타나고 순례자들이 눈에 띄었다. 산중 유일의 알베르게, 오리존이란다. 산 아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테라스에서 음료수나 와인을 마시는 그들 옆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잠깐 쉬었다가 오늘 안에 론세발레스까지 간다고 했더니, 옆자리의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러기엔 너무 늦었단다. 아니, 해가 중천에 걸려 있고 기운이 아직 넘치는데, 웬말인가! 서툰 영어로 우기는데 맞은편 테이블에서 독서를 즐기던 남자가 가세했다. 벌써 오후 4시인데 아직도 17㎞나 남았으니 더 이상 등반은 무리란다. 이 덜렁대는 아줌마가 그저 산 하나를 넘는다고만 생각했지, 그 산길이 27㎞나 된다는 사실을 흘려넘긴 것이다.

순례자들의 강권에 산장에서 묵기로 겨우 마음을 돌려먹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베르게 운영자가 침대가 없다면서 "운토로 가라"고 한다. 운토? 운토가 대체 뭔데? 이곳에서 3㎞ 떨어진 피레네의 마지막 마을이란다.

되돌아가야 한다니! 이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보기 딱했던지 캐나다에서 왔다는 두 남자가 자동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자원했다.

운토는 외딴 농가 서너 채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초미니 마을. 그들 농가는 잠자리에 저녁과 아침을 곁들인 민박(하루 25유로)을 치고 있었다. 5유로, 7유로짜리 알베르게에 견주면 엄청난 가격이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숙소는 왕년에 헛간이나 마구간으로 쓰였음직한 가건물이었다.

한데 양말과 속옷을 빨아 마당 빨랫줄에 좌악 널어놓고 느긋하게 책을 펼쳐든 순간, '두두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숙소 안으로 몸을 피하자마자 바깥에서는 번쩍번쩍 우르르 쾅쾅, 천둥 벼락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쏟아지는 비, 비, 비…. 여주인은 자주 겪는 일인 듯 심상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문단속을 하고 갔다.

산장에서 차를 마실 때만 해도 얼마나 햇살이 찬란했던가. 민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도 더러 있었으니. 만일 산장에서 순례자들이 생면부지의 나를 굳이 돌려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피레네 깊은 산중에서 천둥 소리에 떨고 장대비에 젖어 있을 것이다.

아아 피레네여! 당신을 너무 우습게 알았다, 제발 용서해 다오. 헛간 침대에 엎드려 자연을 우습게 여긴 무지와 오만을 뉘우쳤다.


피레네 너머 첫 마을 론세발레스 초입의 작은 성당.
# 두 발로 국경을 넘다

다음날 아침, 골안개가 피어오르는 피레네는 씻은 듯 푸르렀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종종 보이던 전반부와는 달리, 중반 이후의 피레네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너른 도로와 양들이 '쩔그렁 쩔그렁' 목방울 소리를 내며 풀을 뜯는 평평한 목초지뿐이었다. 비 피할 나무 한 그루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산길을 걷자니 '오리존의 기사들'이 새삼 고마웠다.

성모상이 있는 산중턱에 이르렀다. 사방으로 겹겹이 펼쳐진 피레네 산군을 처연한 눈길로 굽어보는 성모마리아의 발치에는 돌멩이로 꼬옥 눌러놓은 가족 사진과 소망이 적힌 카드들이 수북했다. 간절한 소망을 빌기 전에 당장의 허기를 면하려고 볶은 곡식을 꺼내 씹어 먹었다. 예상보다 긴 산행 때문에 준비한 비상식이 다 바닥이 나고 말았다.

론세발레스 3.2㎞. 마지막 표지판이 나온 뒤에도 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배낭의 무게는 갈수록 어깨를 파고들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 푸른 초장도 하루 이틀, 길고 외로운 산행에 지쳐갔다.

오후 6시. 숲 사이로 뾰족탑이 머리를 내밀더니 이어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발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 낯설지만 근사했다. 북한 땅만 열려 있다면 우리도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까지도 걸어서 갈 텐데. 외부로 향한 창이 닫히면 마음도 그만큼 가둬지는 법. 비행기나 배를 타야만 국경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구촌 시대에 치명적인 결손이 아닐 수 없다.

침대가 열댓 개밖에 없는 별장 같은 오리존과는 달리, 이곳 알베르게는 100명 넘는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서 마치 군대 막사 같았다. 증명서에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은 뒤 근처 바에 들렀다. 국경 마을 특유의 달뜬 분위기가 감도는 바에서 인상 좋은 바텐더가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지? 일본? 중국?" "아니, 코리아." "북쪽? 남쪽?" "남쪽."

분단의 현실은 안팎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옥죈다. 그러나 '순례자 메뉴'(7유로)로 나온 바스크 지방 특유의 맛있는 생선 요리와 감미로운 와인에 심신의 고달픔이 씻긴 듯 날아가니, 난 역시 형이하학 체질인가 보다.


◆순례자 메뉴▶ 순례자들이 지나는 마을 레스토랑 중에는 이들에게 특별히 저렴하게 코스 요리를 제공하는 곳이 많다. 전채(프미레르 플라토)와 메인(세군도 플라토) 후식(포스트레) 등 세 코스로 구성되는데, 음료로 포도주와 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쉼] 서명숙의 인생 하프타임 산티아고 순례기 [중앙일보]
놓칠세라
보물처럼 숨어있는 길잡이 `산티아고 사인`
찾는 데 집중하다 보니 떠돌던 마음 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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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맹증 남자 만나다

중세풍의 아름다운 돌다리로 유명한 주비리(Zubiri). 피레네에서 나를 구해준 '오리존의 기사들'과 이곳 알베르게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운토로 되돌아간 내가 피레네를 넘었는지 궁금했다고 뛸 듯이 반가워하면서 자기 팀과 저녁식사를 함께하자 했다.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과 프랑스풍이 강해 '작은 프랑스'로 불리는 퀘벡 사람들이 자연스레 친해져 함께 다니는 모양이었다.

순례자들은 팀을 이루어 오는 경우가 많다. 남편과 부인, 시누이와 올케, 오랜 동네 친구, 처남과 매부, 형제와 자매, 직장 동료, 애인 사이, 고교 동창생,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등. 나 같은 솔로 순례객은 열에 한 둘, 게다가 동양인은 더욱 보기 드문 존재다.

영어로 시작된 대화는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리드미컬하고 빠른 프랑스말로 옮겨갔고, 거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 끼여 외롭고 서글펐다.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낯선 땅, 낯선 사람들 틈에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침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단해서 녹초가 된 순례자들은 곳곳에서 코를 골아댄다. 한국에서 떠날 준비를 하며 맨 먼저 장만했던 고성능 귀마개는 배낭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새벽녘. 침대에서 뒤척이느니 차라리 길을 나서자, 걷다 보면 동이 트겠지. 어둠에 싸인 알베르게를 살짝 빠져나왔다. 예측은 빗나갔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훤해지기는커녕 더 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시커먼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고, 발밑엔 물이 찰랑거렸다.

후배가 사준 헤드랜턴마저 산티아고로 부쳐버렸기에(나의 단견을 원망하는 수밖에!) 지독한 어둠을 뚫을 방법이 묘연했다. 담배를 끊은 내겐 라이터마저 없다. 더 갈까, 되돌아갈까? 망설이는데 맞은편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람이다!

와락 겁이 났다.

"카미노?" 그쪽에서 팽팽한 정적을 깨고 말을 건네왔다. 순례자냐고 묻는 걸 보면 강도나 치한은 아니겠지. 야광등 불빛에 드러난 그는 등산복 차림의 잘 생긴 청년이었다.

선량해 뵈는 청년, 멕시코에서 온 펠리페(사진)란다. 밤눈이 워낙 어두워 산티아고 사인을 못 찾겠단다. 랜턴은 있지만 야맹증인 남자와 시력은 좋지만 랜턴이 없는 여자. 천생연분이랄 수밖에. 힘을 합쳐 길을 찾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그가 다리를 아주 심하게 절룩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몸으로 800㎞에 도전을? 첫날 피레네를 7시간 만에 넘었는데 그때 무리해서 근육을 다친 것 같단다. '처음 사나흘은 체력의 60~70%만 쓰면서 몸을 적응시킨 뒤 서서히 속도를 내라'는 산악인 선배의 충고대로 하기를 역시 잘했다. 마음은 외로움에 비틀거려도, 두 다리는 갈수록 강건해지고 있으니.

#휴대폰 벨소리 사라지다

시간이 흘러도 해는 나오지 않는다. 비 때문이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도 평소엔 아름다웠을 터. 그러나 빗방울 세례를 받은 흙은 콜타르처럼 끈끈해져 걷기에 고약했다. 달라붙는 진흙덩이로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진흙투성이의 산길.들길.숲길.언덕길을 지나면서 '산티아고 사인'을 놓쳐, 오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를 서너 차례. 산티아고 사인은 여러 종류다. 노란 화살표, 하양과 빨강 두 겹 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 문양….

언제 어디서 보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산길.들길의 느티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전나무…. 산티아고 사인은 수종(樹種)과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 나무뿐인가. 목장의 출입문, 전신주, 헛간, 허름한 농가 담벼락, 헛간 한 귀퉁이, 번잡한 대도시 네거리의 신호등 맨 밑칸, 빈 들판에 우뚝 솟은 송전탑 한 구석, 개울가에 놓인 징검다리, 발길에 채이는 거리의 돌멩이, 마을로 진입하는 굴다리 교각 밑,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표시판, 무심코 내려다본 땅바닥, 포도밭 이랑과 이랑 사이…. 산티아고 사인은 흐르는 물과 무심한 하늘에만 없다.

표지판은 예상보다도 더 작고 수수했다. 일부러 숨겨 놓았나 싶을 만큼 도시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 숲속에서 '나 좀 봐 달라'고 아우성치는 커다란 간판과 번쩍거리는 안내판에 익숙해진 눈과 귀는 새로운 환경을 낯설어했다.

몸은 오래된 습관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세포 깊숙이 저장해 두고 있었다. 눈앞에 스페인의 이국적인 풍광이 있건만 마음은 번번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와 두고온 사람들 곁을 서성이고, 두 귀는 한국에 두고 온 휴대전화 벨소리를 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 산티아고 사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풍경과 사물에 집중하노라니 흩어진 마음은 한곳에, 떠돌던 생각은 '여기'에 머무르게 되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연결되는 플러그를 완전히 뽑아버린 언플러그드 세계에서, 내 몸으로 밀고 나가는 속도만큼 움직이는 아날로그적인 세계에서, 느릿느릿, 평화롭게….

#보행자가 왕이더라

팜플로냐(Pamplona)를 눈앞에 두고, 근육 통증 때문에 쉬어가면 더 고통스럽다는 펠리페를 떠나보냈다. 멕시코시티에서 웹호스팅 업체를 운영하는 젊은 오너 펠리페는 좋은 길동무였다. 그러나 게으른 순례를 원하는 나와 쉬지 않고 걸어야만 하는 그는 함께 갈 수 없었다. 따로, 또 같이. 순례길에선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레 여겨야 한다.

이윽고 팜플로냐다. 여러 작가가 '보석 같은 도시' 팜플로냐에 관한 글을 남겼다. 오래된 성곽, 고풍스러운 수도원, 세월의 축적을 여실히 증거하는 중세풍의 대학, 황소축제가 벌어지는 시내 중심가의 그림처럼 예쁜 가게들, 섬세하게 직조된 다양한 빛깔의 옷감 따위를 예찬하는 ….

나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팜플로냐에 반했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종잇장에서나 가능한 구호가 철저하게 실현된다는 점. 수도원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고 시내 곳곳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숱하게 만났다. 운전자들은 초록불이든 빨간불이든 신호등의 색깔과 무관하게 보행자가 눈에 띄기만 하면 일단 멈춰섰다. 그러곤 보행자가 지나갈 때까지 끈덕지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길은 오로지 자동차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횡단보도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보행자를 깔아뭉갤 듯 밀어붙이는 자동차 권력에 길들여진, 속도가 지배하는 자동차 왕국에서 철저하게 복종과 순응을 강요당해온 신민(臣民)으로서는 불편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걷기의 자유로움과 느긋함을 도시 안에서 누리고 만끽하는 건 멋진 일이었다.

되찾은 보행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알베르게에 돌아와 보니 순례자 수십 명에 부엌의 가스불은 달랑 두 개. 한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값싼 생토마토를 양껏 넣은 스파게티를 만들고 2유로(2600원)짜리 포도주 한 병을 곁들여 나 혼자만의 만찬을 즐겼다. 디저트는? 달콤쌉싸름한 고독감!!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쉼] 어! 코엘료 `연금술사` 작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중앙일보]
촬영차 나온 그와 사진 찍고 대화까지

페르돈 언덕 정상에 있는 철로 만든 순례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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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 둘과 길동무 하다

중세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팜플로냐를 한나절 둘러보다가 느지막하게 길을 떠났다. 피레네 이후에는 5~10㎞ 간격으로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마다 크고 작은 알베르게가 있기에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순례자 대부분이 묵어가는 팜플로냐에서 5㎞밖에 안 떨어진, 그래서 손님이 드문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의 한적한 알베르게에서였다.

"혹시 한국 분?" "맞는데요. 당신도 한국 사람?"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젊은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자기 짐작이 맞은 걸 확인하자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녀보다 더 어려보이는 여자다. 지난해 중국 여행길에서 만난 한국 여자 K와 M은 1년간의 세계 여행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고, 첫 여정으로 산티아고 길을 택했단다.

다음날 아침 우리 셋은 십년지기처럼 다정하게 길을 나섰다. 페르돈 언덕은 품 넓고 경사가 완만한 피레네와는 달리 좁고 가팔랐다. 울퉁불퉁 너덜길도 자주 나타났다. 피레네에선 바람처럼 경쾌하게 내 곁을 지나쳤던 자전거족들이 이곳 페르돈에선 애물단지를 끌고 가느라 쩔쩔맸다. 인간만사 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니까, 속으로 웃음을 깨물었다.

언덕 위의 풍력기가 그림처럼 서 있다. 바람이 없는 탓에 돌기를 멈춘 채. 무더위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푹 퍼져 언덕 정상에 올랐더니, 일군의 말 탄 순례자들이 반긴다. 당장이라도 저 산등성이 너머로 내달릴 듯 역동적인 프로필이다. "아, 페르돈 정상에 순례자 형상의 철 조각이 있다고 했지." 오르막과 씨름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아득한 첩첩산중, 올려다보니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 하늘 너머로 비행기가 하얀 꼬리만 남긴 채 사라져간다. 두고온 인연이 문득, 마음에 사무친다.

#'코리안 팬케이크' 히트 치다

사람이 그립다 보니 입맛이 일깨워진 건가. 따뜻한 국물이나 부침개가 먹고 싶었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두 여자에게 제안했다. "오바노스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부침개나 해먹자." 바게트 샌드위치나 값싸고 풍성한 과일로 때우던 그들은 귀찮은 눈치였다. 짐짓 모른 척하고 밀어붙였다. 가게에는 밀가루는 물론이고 호박과 양파도 있었다.

지치고 가난한 순례자들은 거개가 딱딱한 빵이나 간편한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축만 근처 레스토랑으로 진출했다. 알베르게 부엌에서 음식 만들기에 도전한 팀 중 맨 먼저 작품을 완성한 건 우리 팀이었다. 흔히 번거롭게만 여기는 부침개는 맛과 속도에서 놀라운 국제경쟁력을 발휘했다. 콩기름 대신 올리브유를 둘렀는데도 아쉬운 대로 비슷한 맛이 난다.

페르돈 언덕 오르막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네덜란드 여자가 냄비 속의 달걀이 삶아지기만 학수고대하고 있기에 우선 요기라도 하라고 부침개를 권했다. 망설이다가 접시를 받아든 그녀는 한입 떼어먹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아이슬란드에서 온 우슬라가 "나도 좀 맛볼 수 있을까요?" 하며 슬쩍 끼어든다.

되고 말고. 부침개야말로 우리 조상이 가난한 살림에서도 이웃에 돌릴 요량으로 넉넉히 만들던 음식 아닌가! 그러자 식당에서 차디찬 비상식을 먹으며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이 너도나도 '코리안 팬케이크'에 관심을 보이고 나섰다. 세 여자가 열심히 부친 부침개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이 일로 우리 셋은 '카미노의 천사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느릿느릿, 즐기면서 걷기로 마음먹은 중년의 여자. 정해진 기한에 되도록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숙제하듯 걷는 아가씨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웠다. 그녀들도 전에 만났던 멕시코 청년 펠리페처럼 떠나보냈다.

시라쿠이에서 파올로 코엘료와 함께.
#얼떨결에 작가 명함 내밀다

우연한 만남은 꼬리를 물었다. 9월 17일 정오를 갓 넘어설 무렵 저 멀리 언덕 위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조는 듯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시라쿠이(Ciraqui)란다. 진짜로 '얼룩배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들판을 지나 동네로 들어서니 어귀에 커다란 방송국 차량이 서 있다. 심심산골에 웬 중계차람? 가까이 가 보니 검정 티셔츠에 검정 바지 차림의 남자와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저 남자 낯이 참 익은데 대체 누구더라? 일단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데 남자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허락 없이 사진을 찍었다고 혼내려는 걸까, 순간 당혹스러웠다. 그쪽으로 걸어가는 사이에 번뜩 뇌리를 스쳐가는 이름이 있었다.

파올로 코엘료!! 산티아고 순례 경험을 첫 작품 '순례자'에서 풀어낸 뒤 아예 작가로 방향을 틀어 '11분' '연금술사' 같은 화제작을 잇따라 쏟아낸, 한국에도 두터운 독자층을 가진 코엘료였다.

뜻밖에도 그는 사진을 함께 찍자고 권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나는 한국인인데 당신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니 몹시 반가워한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되묻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기사도 안 쓴 지 오래인지라 엉겁결에 "작가"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코엘료는 더욱 반색하면서 언젠가 당신 책도 읽고 싶다고 덕담을 건넸다. 다행히 촬영이 재개되는 바람에 그는 돌아섰고,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책을 한 권 쓰긴 했으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지, 자위하면서.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바에서 샌드위치를 시켜먹으면서 주인에게 귀동냥한 바로는 코엘료가 워낙 이곳을 좋아해 가끔 찾아오는데 이번엔 방송사 다큐멘터리 촬영차 왔단다. 주인은 코엘료 덕분에 마을이 활기가 넘친다고 싱글벙글이다.

이라체 포도주 공장의 수도. 왼쪽에선 붉은 포도주가 나온다.
#길가 포도를 취하다 ^·^

다시 솔로가 됐지만 예전처럼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래 걷기에 익숙해지고, 포도밭과 낮은 구릉과 뭉게구름을 하릴없이 지켜보는 데 맛을 들였다. 키 작은 풀꽃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에서 달고 싱싱한 포도를 취하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포도는 가지가 휘도록 열렸고, 일부는 나무에 매달린 채 건포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포도 서리의 유혹으로부터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르망디에서 온 순례자와 이야기하다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훔쳤다(stolen)"고 했더니 "나는 '취했다(take)'고 한다"면서 눈을 찡끗했다. 아, 이렇게 적절한 표현도 있는 것을.

포도의 고향은 또 다른 선물을 예비하고 있었다. 9월 19일 아침. 에스테야의 알베르게를 나선 지 두어 시간 만에 왼쪽 수도꼭지에선 붉은 포도주, 오른쪽 수도꼭지에선 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에 이르렀다. 수도원 뒷문 수도꼭지 주위에 모인 순례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로또라도 당첨된 양 즐거워한다. 작은 일에 감사하라는 금언을 순례자만큼 잘 실천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이라체 수도원에는 가톨릭이 융성하고 교황청이 권력의 정점이었던 시절 엄청난 숫자의 수도사가 모여들었고, 그 명성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시간은 이처럼 당대의 모든 찬란했던 것을 부식시키고, 당대의 절대권력을 허망하게 만든다. 이라체에서 비정한 세월의 힘을 이겨낸 건 '신이 내린 보석' 포도뿐이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쉼] 산티아고 아리랑 [중앙일보]
뭐가 바빠 뜨는 해 지는 노을도 못 봤나 아리랑
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속끓였나 아라리요

도시의 건물 사이로 아름다운 머리를 내민 산토도밍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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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순례길에 오른 지 열흘 만에 금주 모드에 돌입했다. 로그로뇨에서 순례자 번개모임이 끝날 즈음 사람들은 도중에 헤어지더라도 10월 15일 일요일 12시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스테판은 한술 더 떠서 '와인의 수도'에서 마지막 잔을 비우고 산티아고에 갈 때까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차원에서 금주를 하자고 제안했다. 담배를 끊은 뒤 술이 늘어 주량이 고민하던 나는 이참에 정말 끊어볼까 싶어서 스테판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혼 소송 이후 술에 의지해온 펠리페도 적극 찬성! '로그로뇨의 결의'가 이뤄졌다.

# "힘내라 수키" 큰 ~ 편지를 받다

그 많던 포도밭이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남도길 같은 황톳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땡볕이 내리쬐고 진흙이 푸석푸석 날리는, 그러나 한없이 정겨운 그런 길. 하루, 이틀, 사흘…. 비슷한 풍경과 여정이 되풀이되면서 피부는 점점 구릿빛을 띠고, 몸의 살들은 어디론가 떠나갔다. 가난한 후배가 큰맘 먹고 사준 등산용 반바지가 갈수록 헐렁해진다. 체중이 가벼워질수록 몸은 더 오래 걷기를 원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등 뒤에서 젊은 여자가 날 불러세웠다. 자기는 아이슬랜드에서 온 모니카란다. 혹시 당신 이름이 수키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저쪽에 당신에게 온 '큰 편지(big mail)'가 있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 같단다. 길에서 편지? 그것도 큰 편지? 그녀는 지나온 길을 가리킨다. 'Courge Sooki(힘내라 수키)'라고 막대기로 큼지막하게 휘갈긴 글씨가 땅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쳐 왔구나!

누군지 알 만했다. 아까 풀밭에서 후배가 준 푸른빛 숄을 식탁보 대용으로 깔고 바게트에 참치 통조림을 얹어 점심을 먹는데, 한 순례자가 다가와 함께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와이 낫(Why not)! 섬세한 프로필의 그 남자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왔다는데, 와인의 고장 출신답게 새끼오징어 통조림을 빵 위에 얹은 뒤 수통에서 경건하게 붉은 와인을 따랐다. 내게도 권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금주 중이라고 사양했다. 길고 우아한 식사를 끝낸 그는 먼저 길을 떠났다. 걷다가 길이 지루했던지 내게도 힘을 내라고 격려 메일을 날린 것이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가슴에 따뜻한 물결이 밀려왔다. 졸지에 배낭 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산티아고 길이다.

"courage sooki" 땅 위에 쓴 큰 편지는 배낭의 무게를 절반으로 줄여주었다. 카미노에서 순례자들은 서로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꽃보다 아름다운'사람들이다.
# '천사의 솜씨'와 맞닥뜨리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다 낭만적이고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다. 에스파냐 고딕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부르고스(Burgos) 대성당을 보러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행길이었다.

9월 24일 아침. 알베르게를 나설 무렵 시작된 비바람은 산 하나를 다 넘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몸도 젖고, 배낭도 젖고, 마음도 젖는다. 정상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마저 비에 젖어 운다. 하산길은 더 지루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를 즈음, 비 젖은 마을이 흐릿하게 그 윤곽을 드러냈다. 유일한 바에 들어가 보니 앞서 하산한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일손 달리는 주인 여자를 거들어주면서 기다린 끝에 뜨거운 코코아와 좋아하는 '또르티야(달걀에 감자나 햄을 넣어서 도톰하게 쪄낸 요리)'를 먹으니 다시 기운이 샘솟는다.

부르고스로 가는 도중에 만난 작은 마을의 성당 뒤뜰에 자리한 공동묘지.
약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속도로로 이어진 길은 부르고스 표지판이 보인 뒤부터 악몽의 연속이었다. 타이어 공장에서 풍겨나오는 독한 냄새, 수많은 신호등, 도시를 메운 차량들…. 뼛속까지 젖은 몸으로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해보니 침대가 다 찼단다. 이런 몸을 이끌고 도심에서 2㎞나 떨어진 또 다른 알베르게까지 가야 한다니, 까짓것 눈 딱 감고 시내에 즐비한 호텔이나 호스탈(호텔보다 조금 저렴한 숙소)에 확 들어가 버려? 그러나 기왕 한 고생, 어디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이를 악물고 시내 한복판을 관통할 즈음, 헛것을 보았나 의심이 갈 만큼 거대하고도 섬세한 프로필의 부르고스 대성당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다. 스페인에서 셋째로 큰 이 성당을 두고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체는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고 여성의 몸을 꾸미는 보석처럼 정교하다'고, 당시 국왕 펠리페 2세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천사의 솜씨'라고 했다던가.

사아군의 알베르게 입구. 지팡이에 조개껍질을 매단 순례자가 순례자를 맞는다.
산티아고 길은 본디 성야곱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걸어간 길이라서 마을마다 성당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이 마을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반면 미사에 참석하는 신도들은 노인 대여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부조화한 대비는 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했다. 교황청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역사상 '어둠의 시대'로 불리는 중세의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투영된 성당 장식도 근대인인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황금빛 옷자락,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머리에 불안정하게 씌워진 보석관을 보면서 묘한 저항감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성당에서 만난 소박한 예수상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부르고스 대성당은 비판적 시선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완벽한 걸작품에 무슨 찬사를 덧붙일 것이며, 냉정한 사회적 비평을 가할 것인가.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은 대성당을 구경하는 데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는데 순례자들에게는 관람료를 2유로밖에 안 받는다. 순례자가 봉이 아니라 특혜를 누리는 산티아고 길!

# 음치, 서양 남자 감동 먹이다

부르고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메세타(대평원) 지역이다. 어떤 이들은 산티아고 여정 중 가장 지루한 길로, 어떤 이들은 가장 매력적인 길로 기억하는 묘한 곳. 한 가지 분명한 건 명상하기 좋은 길이라는 점이다. 한눈을 팔 만한 근사한 경치가 없고, 갈래길이 많은 산길 들길처럼 길을 잘못 들 염려가 없으니 생각의 바다를 항해하기에 그지없이 좋은 조건이다(혹자는 메세타 자체에 명상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도 한다).

마음의 도마 위에 생각을 한번씩 올려놓아 본다. 미워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일들,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강물 위에 띄운 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그리 분노하고 마음을 상하고 애를 끓였을까. 대체 무엇을 위해 뜨는 해와 지는 노을 한번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살았던 걸까. 너무 바쁜 나머지 정작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온 내가 가엽고 불쌍했다.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노래가 들어앉는가. 언제부터인가,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로 고문한다'고 소문난 음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체면 구길 일도, 눈치볼 이유도 없었다. 레퍼토리는 발라드, 트로트, 동요를 지나 구전 민요로 이어졌다. '진주난봉가'에서 '아리랑', '새야 새야 파랑새야'까지. 뜻밖에 길 분위기와 잘 어울리기에 창자를 쥐어짜며 온몸으로 노래했다(소질이 있었다면 그때 득음했을는지도 모른다).

"브라보(Bravo)!"

난데없는 박수소리와 함께 순례자가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걸음 빠른 서양 남자가 따라잡은 것이다. 핀란드에서 왔다는 남자는 "아름답지만 무척 슬픈 노래 같다. 어느 나라 노래냐"고 묻는다. 노래에 깃든 정조(情調)가 음치를 통해서도 전달되다니, 노래의 힘은 역시 위대하다.

노래에 의지하면서 해바라기조차 고개 숙인 적막한 대평원을 넘던 내가 술 앞에서 무너진 것은, 얄궂게도 처음으로 30㎞의 벽을 넘어선 날이었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바로잡습니다

1월 5일자 '서명숙의 산티아고 순례기' 4회분 중 '왼쪽 수도꼭지에선 붉은 포도주, 오른쪽 수도꼭지에선 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을 '…이라체 포도주 공장'으로 고칩니다.

 

[week&쉼] 베짱이 예찬 [중앙일보]
근심 걱정 미루고 오늘을 즐겨라 …
에스파뇰은 그래서 행복하나니

생선과 고추절임으로 만든 공짜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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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공든 탑 무너지다

'로그로뇨의 결의'를 깨고 술을 다시 입에 댄 날은 하루 41㎞라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은 기록을 세운 날이기도 했다. 아침 6시 이전엔 나갈 수 없다는 알베르게의 규칙을 어기고 새벽 4시에 길을 떠나(순전히 시간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사아군에 이르른 시간은 땅거미가 질 무렵. 일요일에 서는 새벽시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알베르게로 직행했다.

장시간을 바게트와 과일로 때운 터라 사자라도 한입에 삼킬 듯 배가 고팠다. 알베르게 식당에 들렀더니 로그로뇨 번개모임(1월 12일자 참조)의 일원이었던 벤과 그의 일행이 "수키!" 하며 반가워한다. 그들 앞에 놓인 먹음직한 샐러드가 더 눈에 들어왔다. 누가 줬다면서 내게도 권한다. 배고프다고 얼굴에 써 있었나? 벤에게 샐러드를 나눠줬다는 프랑스 여자 프란체스카는 남자친구가 만든 리조토까지 들고와 권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누군가가 "비노(와인)도 한 잔" 하며 따라준다. 열흘 공든 탑이 단번에 무너져내렸다. 후회하기엔 오랜만에 마신 포도주맛이 너무도 황홀했다(술 좋아하는 사람의 자기합리화!).

# 슬럼프를 한방에 날리다

'마의 벽' 40㎞를 넘어선 뒤부터 예기치 못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사아군을 벗어나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밋밋하고 평탄한 길을 지나는데 문득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걸까' 회의가 엄습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왔는데 고국에서 추방당한 사람마냥 처량하게 느껴졌다. 걷기에 이력이 붙고, 어젯밤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는데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사아군을 벗어나자마자 쏟아진 장대비를 피하느라 버려진 병원 건물 처마 밑에서 한참을 옹숭그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느 순례자의 돌무덤 앞에서 길을 걷다가 그 길에서 죽어간 이를 추념(追念)한 때문일까. 비는 얼마전부터 멎었는데도 마음의 벌판에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그러던 중에 발길을 멈춘 작은 마을의 지독히도 어두침침한 바에서였다. 대낮인데도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둘러보니 순례자(복장과 배낭만 보면 금세 알 수 있다)는 나 혼자, 나머지는 모두 마을 사람들이었다. 추운 마음을 데우려고 '카페 콘라체 그란데('밀크커피 큰 잔'이란 뜻)를 시켰다.

울적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저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내게 손동작으로 무언가를 먹어보라고 자꾸 권한다. 조그맣게 자른 식빵에 올리브에 절인 생선과 피멘토(고추)절임을 얹은 안주였다. 여전히 머뭇거리자, 돈을 안 내도 되는 공짜 안주(스페인 바 중에는 공짜 안주를 내놓는 곳이 더러 있다)라고 손동작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계속 모른 체하기도 미안해서 한 개 집어먹은 뒤 맛있다(물론 손동작으로)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사람좋게 생긴 주인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와인을 시킨 적이 없는지라 손사래를 치자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자기가 낸단다. 망설이다가 한 모금 마시니 바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공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이방인의 우울증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들의 친절이 명약이었던 걸까.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의 수퍼 점원 아가씨들.
오래된 좋은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사람들이 바로 에스파뇰(스페인 사람)이다. 인간미 넘치는 에스파뇰들은 스페인의 산하를 더 아름답게, 산티아고 여정을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밭 둔덕에서 해바라기하고 있는데 단물이 줄줄 흐르는 싱싱한 멜론에 먹음직한 토마토까지 얹어줘 배낭을 더 무겁게 만든 아저씨도, 마을 언덕의 잘생긴 무화과나무를 찍고 있는 내게 잘익은 그 열매를 꼬옥 쥐어주면서 부챗살 같은 미소를 짓던 할머니도.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그들을 보노라면 800㎞를 걷는 순례자들보다도, 그 길을 지키고 사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페레그레노(순례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그러나 즐기면서 걷는 삶의 순례자들!

안주와 와인을 공짜로 준 바 주인.
# 시에스타가 비결이었다

레온(leon), 웅장한 고딕식 대성당으로 유명한 레온 지방의 주도(州都). 이 도시는 산티아고 순례자라면 예외없이 하룻밤 묵어가는 곳이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호텔이나 호스탈에서 2~3일 묵으며 모처럼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한꺼번에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들은 레온에서 일단 여정을 갈무리한 뒤에, 다음번엔 레온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순례길의 중요한 거점인 셈이다.

무화과를 따서 손에 꼭 쥐어준 할머니.
나를 놀라게 한 건 도시의 규모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레온 사람들도 농촌 사람들과 그닥 큰 차이가 없어보였다. 한없이 느긋한 표정, 여유있는 걸음걸이, 인생을 즐기는 태도. 에스파뇰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농촌이나 그렇지 도시 사람들은 다르겠지, 내 삐딱한 기대(?)는 보기좋게 배반당했다.

대성당을 둘러보고 난 뒤 도시 외곽의 알베르게로 돌아가려는데, 길치 아니랄까봐 왔던 길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는 수밖에. 내게 붙들린 에스파뇰들은 한결같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에게 이 멋진(!) 과제가 떨어져 무척 기쁘다는 표정으로, 손짓 발짓 몸짓을 총동원해서 가르쳐 주었다.

여러 사람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어렵사리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옆 침대 남자가 반갑게 맞이한다. 여러 번 같은 숙소에서 만나 낯이 익은 영국인 로버트다.

그는 30년 넘게 군생활을 하다가 대령으로 전역한 퇴역 장교. 아직도 엄격한 규율 아래 한평생 살아온 군인의 얼굴이 남아 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에스파뇰이 한결같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가 화제에 올랐다. 군인 출신답게 그의 결론은 단순 명쾌했다.

"시에스타 덕분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쉬니까 해피할 수밖에."

점심시간에 관공서와 상점의 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는 외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힘들지만 더 나아가 순례자에게는 매우 고약한 관습이다. 산과 들을 지나 가까스로 마을에 당도해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도 사고 장을 보려고 해도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불가능하다. 상점에 아무리 예쁜 물건이 많고 풍성한 식재료가 있으면 뭐하나? 그림의 떡이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띤 복권 파는 아저씨.
이런 황당한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시에스타'를 은근히 적대시하는 감정까지 품게 되었는데, 이 멍청하고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관습이 에스파뇰을 행복하게 만든 비결이라니! 그러고 보니 '슬로 라이프'를 제창한 쓰지 신이치도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쓰는 '아스타, 마니아나'(내일 하자, 내일!)와 일본 대중가요 '내일이 있다'를 비교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근심 걱정을 미루고 바로 지금 소중한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데 반해 일본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흔히들 스페인 사람과 한국 사람은 닮은 데가 많다고 한다. 종교적이면서도 현세지향적이고 감정이 풍부하고 신명이 많고 가부장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체험도 비슷해서 스페인 역시 이민족에 오랜 기간 침탈을 당했고, 치열하고도 고통스러운 내전 후에 프랑코 총통 치하에서 40년 넘는 장기독재를 경험했다. 국민소득이나 생활 수준도 엇비슷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삶의 속도라는 측면에서는 극히 대조적이다. 스페인은 문명화된 산업국가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슬로 라이프'를, 한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숨가쁜 '패스트 라이프'를 구가한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흔쾌하게 포즈까지 취해 준 목동 아저씨.

 

[week&쉼] 소중한 사람 [중앙일보]

만하린에 당도하기 전에 산중에서 만나게 되는 철십자가. 사람들은 그 주위에 돌멩이를 쌓기도 하고 소원을 비는 쪽지를 끼워놓기도 한다. 원래 오래된 아주 고풍스러운 십자가가 있었는데, 그 십자가는 철거되고 새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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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빗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전직 기자도 아닌

그저 '서명숙'이라는 한 인간이었다

녹록지 않은 순례길을 끝까지 함께해 준 어여쁜 길동무들.
산티아고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 사이에는 부상자가 늘어났다. 알베르게는 종합병원을 연상케 했다. 열 발가락 모두에 물집이 잡힌 사람, 근육이 파열된 사람, 인대가 늘어난 사람, 잦은 설사에 시달리는 사람, 오랜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 등등.

순례길에 오르면서 스스로에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정성을 다해 몸을 돌보고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하겠다고. 가장 소중히 여기고 맨 먼저 돌봐야 할 것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학대까지 했던 전반전을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후반전을 제대로 뛰기 위해서는 더더욱.

매일 밤 침낭 안에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석구석 마사지하면서 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참 수고했다, 사랑한다, 내일도 부탁한다." 배낭여행의 원조 한비야씨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걸으면서 단련하고 자기 전에 돌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내 몸은 상한 데,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레온을 지나 대평원을 완전히 벗어날 즈음에는 몸은 장기 레이스에 익숙한 '순례자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 가난한 순례자, 최고의 성찬을 허락받다

몸의 전환이 이루어질 즈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길'에 대한 확신도 어느 정도 생겼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시간을 오후 2~3시에서, 3~4시로, 다시 5~6시로 조금씩 늦추었다. 길을 많이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포도주가 숙성하는 계절이 따로 있듯이 생각도 익어가는 시간이 따로 있는 걸까. 이글거리던 태양이 물러가고 사물이 수굿하게 고개를 숙이고 짐승들도 제 우리로 돌아갈 무렵, 홀로 길을 걷는 것은 그 자체가 행선(行禪)이요, 묵상이요, 기도였다. 해질녘은 자신에게 말 걸기에도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엔 조금 멀고 눈앞의 마을에 들어가기엔 다소 이르다 싶을 때는 풀밭에 앉아 그리운 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때로는 짧은 그림엽서, 때로는 아주 긴 편지를.

'타바코'(담배가게)에서 고심하면서 고른 엽서에, 무슨 말부터 쓸까 긴긴 시간을 들여 편지를 쓰고 나서, 행여 떨어질세라 침을 잔뜩 묻혀서 우표를 붙인 뒤, 배낭에 며칠씩 간직했다가, 어쩌다 발견한 노란 우체통(빨강이 아니라 노랑이라서 한동안 눈앞에 두고서도 애를 먹었다)에 조심조심 떨어뜨리는 그 아날로그적인 맛이란! 청마(靑馬.고 유치환 선생의 아호)가 우체국 창가를 좋아했던 이유를 새삼 깨닫는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먹는 패턴도 달라졌다. 덧창까지 꼭꼭 닫은 어두컴컴한 바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햇빛을 차단하려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보다는 찬란한 햇살 아래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옆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그늘이 시원해 뵈는 둔덕에 식탁보 겸용 치마를 깔고서 평소처럼 바게트 샌드위치를 준비하는데 한가닥 아쉬움이 들었다. 참치 통조림과 토마토는 있는데 야채만 없었기에. 근데 이게 웬 떡? 아니, 웬 양상추? 둔덕 아래 텃밭에서 자라는 속살 연한 양상추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마침 앞치마 두른 아주머니가 지나가기에 양상추의 주인을 물어봤더니, 자기가 심은 거라면서 한 움큼 뜯어주는 게 아닌가. 샌드위치의 필요충분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지는 순간이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몸을 뒤채는 시냇물과 물가에 심긴 푸른 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생애 최고의 샌드위치를 조금씩 떼어서, 천천히 음미했다. 사막의 도시 두바이에 세워진 7성급 호텔의 전망,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 이보다 더 멋지고 맛있을쏘냐. 마음 가득한 행복이 바깥으로 흘러넘쳤던 걸까. 지나가던 차들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길 가던 순례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알렉산더 폰 쇤베르크는 저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에서 가난해지는 그 순간 맘만 먹으면 우아하게 사는 길이 열리지만, 부자들은 부의 천박한 속성 때문에라도 우아해지기 힘들다고 역설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가난하기에 우아한 삶이 가능하다는 역설을 입증하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그중 하나가 소음과 간판과 불빛이다.

한계령을 빼닮은 산중마을 만하린(Manjarin), 인적이 드문 산마루에서 마주친 이탈리아 출신 순례자가 말했다. "정말 완벽하게 조용한 곳이다. 고요는 자연이 준 귀한 선물이니 충분히 즐겨라. 그 고요를 마음에 담고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

생각하면 눈물 나는 어머니 같은 산, 라디오 볼륨을 잔뜩 높인 등산객 등쌀에 시달리는 북한산에 이 고요를 부려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 백골의 공포 속에 한가위 보름달을 맞다

강화된 체력을 믿고 걷는 시간을 늘리다가 졸경을 치르기도 했다. 추석 전날이었다.

오후 두어시쯤, 마을을 지나는데 여자들이 알베르게 문 앞에 주저앉아 느긋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순례 초반에 며칠간 같이 걸었던 한국 여자 K와 M이었다. 날이 날인지라 조금만 걷고 알베르게에서 일본 사람들이랑 맛난 음식을 해먹기로 했단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몸이 원하는 건 달랐다. 애걔, 요만큼 걷고 멈추자고?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고 하늘은 저리도 높은데? 먹어봐야 살만 찌는 음식보다야 맑은 공기 마시는 게 몸에 이롭지(소문난 먹보 아줌마의 놀라운 변신!). 조금 더 걷자니까.

아쉬움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다음 마을로 막 들어서려는데, 한 남자가 산티아고 기념품을 좌판에 늘어놓고 판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 마을에서 자고 가라. 다음 마을엔 알베르게가 없다"(물론 손짓 발짓으로)고 일러준다. 알베르게와 손님 유치 계약을 맺었나?(한국 사람다운 의심!) 책에는 그 마을 알베르게가 연중 내내 문을 연다고 적혀 있는데.

충고를 무시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목표한 마을에 닿은 건 오후 6시가 다 돼서였다. 한데, 알베르게가 정말 문을 닫았다. 다음 마을은 7㎞ 더 가야 한다. 인가가 몇 채 있으니 재워달라고 사정해 볼까, 조금 늦었지만 '빡세게' 걸을까. 걷는 쪽을 택했다. 아직은 견딜 만한 다리와 좋은 날씨만 믿고.

텅빈 아스팔트길을 혼자 걷노라니 어느덧 석양녘. 산티아고 여정 중 최고의 노을이었다. 태양은 거대한 비늘구름의 호위 아래 붉고 긴 옷자락을 이끌면서 우아하게 퇴장했다. 유혹을 뿌리치고 길 떠난 순례자에게 대자연이 허락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가도 가도 마을은 안 보이고, 길은 적막과 어둠에 두껍게 포위되었다. 대평원에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불렀던 노래도 나오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길이 끊어지고 좁은 산길이 나타났다. 낮에라면 그지없이 정겨웠을, 완만한 오르막길. 먼 나라에서 컴컴한 산중을 혼자 걷자니 두렵고 떨렸다.

이윽고 보름달이 떴다. 바로 그때였다. 길섶에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뼈를 본 것은(무슨 뼈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공포와 피로와 굶주림이 한꺼번에 덮쳐와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깨지고, 벌벌 기다시피 산길을 벗어났다.

아스팔트길이 다시 열리고, 아련히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흙과 땀에 뒤범벅된 얼굴로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쉬던 순례자들이 입을 딱 벌렸다. 나중에 듣자니 꾀죄죄한 행색보다는 내가 들어선 시각에 놀랐단다. 그때가 밤 9시였다.

# 핏줄기를 타고 넘치는 자유여, 기쁨이여

악몽 같은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10월 11일 아침. 해발 1300m의 알토 데 폴로(Alto de polo)에서 하룻밤 묵고 산장을 나서려는데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바 안의 페치카 앞에서 불을 쬐는 순례자들은 한결같이 난감한 표정이다. 한 여자가 배낭만이라도 택시로 보내버리자고 제안했다. 결국 여섯 명이 5유로씩 거둬(택시를 대절하는 삯은 30유로) 15㎞ 떨어진 트리아카스텔라의 알베르게로 배낭을 부치기로 했다.

배낭마저 떠나보내고 안개비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처량해 보였다. 배낭이 없으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한달 만에 배낭은 내 몸의 일부가 돼버린 걸까. 왠지 어깨가 허전하고, 마음도 헛헛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빗발이 가늘어지니 후회가 밀려든다. 트리야카스텔라까지 무사히 도착해 나를 기다릴까, 만일에 대비해 카메라나 노트는 빼놓을 걸 그랬나?

추위도 잊을 겸 걱정도 잊을 겸, 배낭도 없는 터에 뛰기로 결심했다.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할 때 회사 마라톤 대회에 두 번 참가했더랬다. 그때처럼 5㎞만 뛰자.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한달 동안 5㎏쯤 몸무게가 줄었는데 그 영향 덕분일까, 몸이 날 듯 가벼웠다. 한라산 5.16도로를 꼭 닮은, 지그재그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걷는 순례자를 하나 둘, 따라잡았다. 일부러 욕심내지 않았으나 절로 그렇게 되었다.

비에 씻겨내린 순정한 초록으로 뒤덮인 산. 그 산을 내달리면서 무언가 핏줄기를 타고 흘러넘쳤다. 자유, 였다. 기쁨, 이었다.

그날 그 빗속에서 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전직 기자도 아닌 그저 '서명숙'이라는 한 인간.

이제 그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dailymarket@hanmail.net

 

24시간 잠들지 않는 나라, 사느라고 바빠서 정작 삶을 누리고 즐길 만한 여유가 없는 사회, 낮에는 직장일로 밤에는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술자리로 심신이 녹초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평균적인 직장인들. 로버트 대령의 분석대로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나라' '불쌍한 사람들'이 되는 셈인가?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쉼] 달밤 행군 [중앙일보]

`10월 15일 정오 산티아고 대성당 앞`… 목표를 향해 막판 스퍼트!

캄캄한 밤이라고 걷지 못할쏘냐. 꽉 찼던 보름달이 산티아고가 가까워올수록 반달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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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스(Samos)의 수도원 알베르게는 운동장만 한 원룸. 먼 길에 지친 순례자들이 여기저기서 골아대는 코골이 소리, 화장실로 가는 무거운 발소리, 이어지는 물 내리는 소리, 뭘 잘못 먹었는지 밤새 무언가를 게워내는 소리…. 며칠 전에 통과한 폰 페라라의 알베르게에서 화장실에 가려다 이층침대에서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앰뷸런스에 실려갈 뻔했었다. 그 때문에 아예 화장실 입구에 자리 잡았는데, 치명적인 오판을 한 것이다.

"내 다시는 알베르게에 들어오지 않을 테다." 침낭 안에서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그럼 호텔? 호스탈? 돈도 돈이려니와 썩 내키지 않는다. 차라리 밤중에도 걷는 건 어떨까? 이 순례길의 선구자 야고보 성인도 밤을 틈타 먼 길을 좁혔는지도 모른다. 우리 조상님네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하는 깜깜한 밤길을 걸었잖은가.

순례 초기의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10월 15일 정오에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사흘밖에 안 남은 현재, 남은 거리는 145㎞. 이제까지의 속도대로라면 닷새는 걸린다. 야간에도 걷는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산티아고 길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길'임은 지난 한 달여의 경험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해보자! 아님 말고.

# 첫째 날 별빛 들판에서 잠을 청하다


순례자 대부분이 묵어가는 아름다운 도시 시리아(Sirria)를 눈물을 머금고 통과한 뒤, 어느 작은 마을 어귀의 민박집 겸 레스토랑에서 야간행군을 앞둔 영양 보충 차원에서 '순례자 메뉴'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옆에서 식사하는 베네수엘라 청년 넷이 침대가 여섯 개인 민박집을 통째로 빌렸다고 떠든다. 자고 갈까, 하는 미련과 어둠 속에서 걸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해는 어느덧 산등성이 저편으로 꼴깍 넘어가고 유혹적인 푸른빛이 대지를 휘감을 즈음, 더 늦기 전에 배낭을 둘러멨다. 무슨 일이 기다릴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열정과 떨림!

얼마나 걸었을까. '산티아고까지 100㎞'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아, 걷다 보니 이런 순간도 찾아오는구나! 앞서간 이들도 비슷한 심경이었나 보다. 지니고 있던 손수건, 지팡이, 모자, 사연 담긴 카드 따위를 돌 위에 얹어놓았다. 심지어 신던 등산화를 벗어놓은 이도 있다(뭘 신고 가려는 거지?).

거기까지는 좋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산티아고 사인'을 놓치고 말았다. 금세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덤불숲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리저리 내달려 봐도 잃어버린 사인을 찾을 길이 없다. 마을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동안의 경험칙에 비추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그 자리에 정지하느니만 못하다. 엎어진 김에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다시 찾자.

날은 그다지 춥지 않으니 견딜 수 있겠지. 돌담으로 둘러쳐진 풀밭에 들어가 침낭을 깔고 누웠다. 산악전문가 백승기 선배를 쫓아 비박이라도 한번 연습하고 올 것을,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침낭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빈 공간이 없을 만큼 별이 빼곡했다. 별 보면서 자는 게 얼마 만인가. 어린 시절 서귀포 천지연 근처 매일시장통에 살 적에 평상 위에 엄마 무릎 베고 누우면 이마 위로 별이 쏟아졌더랬는데.

매트리스도 깔지 않은 터라 시간이 흐를수록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배낭을 뒤져 옷을 죄다 꺼내 입었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성질 더러운 사람은 이래저래 고생이라니까, 후회막급이었다.

이를 덜덜 떨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져내려 풋잠마저 깨고 말았다. 고개를 빼 보니 눈부신 반달이 날 향해 빙그레 웃는 게 아닌가! 밝은 달빛에 비추인 침낭 주변은 밤새 내린 이슬로 온통 물덤벙이었다.

더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달빛에 의지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신의 무기는 인간의 것보다 역시 우월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노란 화살표는 사인을 놓쳐 허둥대던 그 지점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변전소 담벼락 귀퉁이에 숨어 있었다.

# 둘째 날 카사노바 마을에서 경을 치다

추위를 이기느라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잔 탓일까. 온몸이 두들겨맞은 듯 욱신거렸다. 열댓 시간 무거운 배낭을 감당한 어깨는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어제 목표를 초과달성했으니 오늘은 딱 한 번만 알베르게에서 자자, 대신 마지막 날은 아예 '올나잇'을 하자, 다시 한번 궤도수정을 했다.

석양 무렵, 폰트 캄파냐 마을. 레스토랑을 겸한 알베르게를 찾았다. 식당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침을 꼴깍 삼켰다. 한데 또 '머피의 법칙'이다. 그 망할 놈의 베드가 또, 없단다. 운영자는 미안해하면서 1㎞만 더 가면 알베르게가 나온다고 일러준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던 순례자들이 나보다 더 걱정스러워한다.

까짓 1㎞쯤이야. 달빛에 드러난 산길은 허연 바위투성이다. 마치 관악산 입구 같다. 고향산천을 떠올리면서 감상에 젖어드는데 난데없이 개짖는 소리가 요란했다(스페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스페인 개들은 에스파뇰을 닮아서 순하디순했고, 졸거나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놀라서 쳐다보는 순간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번쩍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 마리, 두 마리, 무려 세 마리나!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데, 불빛과 함께 한 남자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인가였다. 순간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놈의 개들 좀 묶어놔!" (물론 한국말이었다).

사납게 달려들던 개들을 능숙한 휘파람으로 순식간에 불러들인 그 사내는 열쇠를 절그럭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 집 맞은편이 알베르게였던 것이다.

그는 며칠째 찾아오는 순례자가 없어서 문을 잠가 놓았다고 미안해했다. 알베르게는 무려 스무 개의 침대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각각 6개나 되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침대 한 칸도 못 얻었던 처지에 알베르게 한 채가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밀린 샤워까지 곱빼기로 하고 느긋하게 잠을 청하려는데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엉큼하게도 아까 그 남자가? 차라리 그냥 걸을 걸 그랬나?"

공포감에 떨면서도 꿋꿋이 버티는데 여자가 새된 목소리로 문을 열어달란다. 이층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순례자 커플이다. 한달음에 굴러내려가 냉큼 문을 따주었다. 두 차례나 내 넋을 빼놓은 이 마을 이름은, 얄궂게도 카사노바(Casanova)였다.

# 셋째 날 새벽 3시 15분 … 12km 남았다

사흘째. 걸어도 걸어도 길은 줄어들 줄 몰랐다. 가도 가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발바닥은 달아오르고, 배낭끈은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밤에 쉬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

밤 1시쯤. 비틀거리는 다리,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버스정류장 나무의자 위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올려다보니 하늘 가득 별.별.별…. 친정엄마가 사무치게 그립다.

다시 일어나 야간행군을 재개한다. 다리는 좀 가뿐해졌지만, 어깨는 더 무거운 느낌이다. 가다가 발밑이 훤해지기에 올려다봤더니, 어젯밤 달님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별이 지켜주고 달이 인도하는구나, 든든한 원군을 만난 기분이다.

가다 보니 불 켜진 집이 보인다. '바' 간판이다. 혹시나 들여다봤더니, 세상에나 그 시간에 홀 안에 손님이 그득하다. 바 안의 벽시계가 새벽 3시15분을 가리킨다. 동네 남자들 십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취향대로 차와 술을 마시다가, 약속이나 한 듯 군가풍의 노래를 합창했다. 몇 명은 자리를 뜨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죽치고 앉아 있다(대체 언제 집에 들어가는 걸까?).

몸을 녹이고 사람 구경을 하고 나니 절로 힘이 솟는다. 이제 12㎞ 남았단다. 산티아고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week&] 마침내…꿈꾸는 자가 아니라 떠나는 자만이 목적지에 이르나니 [중앙일보]

내 인생의 하프타임이 저물어간다. 치열했던 전반전을 이젠 온전히 떠나보내야 한다. 곧 시작될 후반전을 위해.[여행작가 김남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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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순간 …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마침내 '기쁨의 언덕'에 이르렀다. 10월 15일 낮 12시가 살짝 지난 시각이었다. 9월 10일 생 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한 지 35일 만이다. 5㎞만 가면 800㎞ 여정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언덕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산티아고 시가가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산티아고가 눈앞에 보이자 마음이 달라졌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도시 산티아고와의 만남을 되도록 늦추고 싶었다. 달빛 속에서 걷느라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를 언덕배기 풀밭에 널어놓고 배낭 안의 쑤셔박힌 살림살이들을 꺼내어 가지런히 정돈했다. 근처 샘에서 목을 축이고 고양이 세수나마 해본다.

휴대용 거울을 비춰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스페인의 태양에 새까맣게 그을린 데다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수도승처럼 맑아진 얼굴이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흡족하다. 몸 또한 필요없는 군더더기를 덜어내서 새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다. 지쳤지만, 강건해졌다.

800km 여정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대성당의 쌍둥이탑이 순례자를 맞아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은 태양의 나라 스페인답게 태양이 작렬하는 오후 2시쯤.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쌍둥이탑은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포즈로 서 있었다.

순례자의 마지막 코스인 '영광의 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12시 정오 미사 때 만나기로 약속했던 벤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미사를 마친 뒤 성당 마당에 진을 치고 뒤늦게 도착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 배낭을 부려놓았다. 배낭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가 아예 벌렁 드러누웠다. 눈부신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누워서 올려다보는 성당은 몽환적이었다. 저마다 행복한 표정의 순례자들이 꿈결 같은 풍경 사이로 흘러다녔다.

완벽한 자유와 온전한 충만이 온몸을 관통했다. 나는 소망한 대로 걸어서 이곳에 왔고, 생애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순간 쏟아지는 햇볕을 즐기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밤이 이슥해지면서 대성당 주변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오래된 골목에 그림처럼 들어선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산티아고가 자랑하는 맛있는 '순례자 메뉴'를 즐기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산티아고 길에서 생겨난 로맨스와 무용담, 그리고 산티아고 길이 자신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가를 늘어놓으면서.

이야기와 술에 기분좋게 취해 숙소로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대성당 한쪽에서 민속 밴드의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한 여성이 열정적인 춤을 선보이는데 뺑 둘러선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한다. 성(聖)과 속(俗)의 공존.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돼 있어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또 다른 매력이다.

대성당에서 도보로 1~2분 거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사흘 동안 밤낮으로 145㎞를 주파한 지독한 강행군에 대한 작은 보상이었다. 흥분 때문에 잠을 쉬 이루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멀리 성당의 첨탑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곳에 왔구나! 꿈꾸는 자가 아니라 떠나는 자만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스페인의 '땅끝마을'인 피니스테레의 해변. 내 고향서귀포의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다.[여행작가 김남희씨 제공]
# 'Everyday Trouble' 분쟁과 갈등을 사르다

다음날 산티아고 우체국에 가서 출발지인 생 장피드포르에서 부친 짐을 찾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마음이 헛헛하고 허탈했다.

스페인 북동부의 끄트머리 산티아고에서도 90㎞쯤 동쪽으로 더 가면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레'가 있다. 마지막 사흘을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걸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발바닥 상태로는 무리다. 버스편도 있다니 그쪽을 이용해 보자.

물어물어 버스터미널로 가 보니 다행히 하루에 서너 차례 그곳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 안에서 뜻밖에도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알베르게에서 여러 번 마주쳤던 독일 남자 보르도와 브라질 여자 후비아. 두 사람은 길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카미노 연인'이었다. 알베르게 생활에 진력이 난 우리는 땅끝마을에서 민박집을 함께 얻기로 의기투합했다.

버스는 휴게소에서 20분 쉬어가면서 느릿느릿 달린 끝에 2시간여 만에 피니스테레 항구에 도착했다. 햇빛 찬란한 산티아고와는 달리 피니스테레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어부 동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이곳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곳은 내 고향 서귀포를 쏙 빼닮았다. 바닷가 출신이라서 그런지 길고긴 내륙 도보여행 끝에 만난 푸른 바다는 눈물겹도록 정겨웠다.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를 같이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름에는 관광객과 순례자로 넘쳐났다는 피니스테레는 철지난 관광지의 쓸쓸함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빈 테이블만이 나란히 바다를 향해 있는 텅 빈 카페, 포구에 묶여 있는 소형 어선들, 비에 젖어 펄럭이는 관광 안내 책자, 마을 규모에 비해 생뚱맞게 큰 대형 수퍼마켓, 문 닫은 곳이 연 곳보다 더 많은 해변가 가게들….

민박집에서 솜씨좋은 '아마추어 요리사' 보르도가 해준 파스타 요리를 남김없이 먹어치운 우리 셋은 항구와 반대 방향에 있는 등대(파두)로 향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불타는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일 무렵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을 태우거나 바다 속으로 던지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독특한 풍습이 전해내려온다. 비바람이 불어 노을을 볼 수는 없지만 그 의식마저 생략할 순 없다.

보르도는 순례 길 내내 운명을 함께해온 지팡이에 자신과 후비아의 소원을 새겨넣었다. 그는 못내 아쉬운 듯 지팡이를 어루만지더니 바다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덜렁이인 나는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 그 대신 '날마다 말썽(Everyday Trouble)'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낡은 티셔츠를 태우기로 했다.

분쟁과 갈등이 없는 세상은 역시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몇 차례나 불을 붙였지만 불길은 비바람에 잦아들고 말았다. 지나던 순례자가 라이터를 빌려주고 불쏘시개용 종이를 대주는 등 난리법석 끝에야 겨우 불이 붙었다. 우리는 티셔츠가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말없이 불길을 응시했다. 깊고 푸른 해벽(海壁) 옆에서.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언하듯 말했다. "난 피니스테레에 사나흘 더 머무를 거야. 왠지 이곳에 마음이 끌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 피니스테레와 서귀포가 오버랩되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나흘이나 더 '피니스테레'에 머물렀다. 날마다 짐을 꾸려 길을 떠나다가 닷새를 한 곳에서 머무르니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빵가게 이층 민박집을 나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마실'을 다녔다. 마을 길은 거의 예외없이 항구로 이어졌다. 좁은 골목이건 비탈진 계단이건, 늘 그 끝에는 푸른 바다가 기다렸다.

부두 정면에 자리잡은 바에는 주로 관광객이나 순례자가 드나들었지만, 모퉁이를 돌면 토박이들이 애용하는 바가 있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거친 사내들이 건들거리는 포즈로 들어와서 여급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 몇몇은 모여앉아 트럼프 내기에 열을 올리는,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짙은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바에서 오전을 보내다가 오후가 되면 바닷가로 나갔다. 그곳 바위에 걸터앉아 섬 하나 떠 있지 않은 망망한 대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피니스테레를 떠날 즈음, 나는 결심했다. 돌아가면 내 고향 제주도를 두 발로 차근차근 밟아보리라. 막힌 길은 돌아서 가고, 끊어진 길은 이어가면서 길을 내어보리라. 가파른 속도와 전쟁 같은 일상에 지친, 논스톱으로 달려온 인생에 쉼표를 찍고 싶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휴식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산과 바다와 오름과 중산간이 두루 어우러진 길을.

지난해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새해를 맞이한 서귀포시 동쪽 보목리 바닷가에서 서쪽 열리 바닷가까지 친정언니와 함께 걸었다. 네 시간 남짓 걸렸다.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니면서도 이렇듯 오래 걸어본 적이 없었다. 두어 군데 길이 끊겨 아쉬움은 남았지만, 서귀포시는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그 어떤 마을보다도 사랑스럽고 매혹적이었다.

피니스테레에서 만난 한 토박이 남자는 항구쪽 바다와 등대쪽 바다, 두 바다를 한꺼번에 굽어볼 수 있는 오름으로 나를 안내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마루에 서서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것이 피니스테레다."

삼매봉에 올라 남빛 주단처럼 펼쳐진 서귀포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곁에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서귀포다"라고.

고향 서귀포의 재발견. 그것은 산티아고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끝>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dailymarket@hanmail.net



산티아고 순례 NG 모음

여행자 수표는 '고액권 휴지'였다 @ 여러 사람이 일러준 대로 경비를 유로화와 여행자수표로 분산했다. 국제적으로 통하는 신용카드 두 장도 함께. 신용카드가 없었으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산티아고 여정에서 여행자수표는 '그림의 떡'이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떼는데도 바꿔주는 은행이나 수표를 받는 가게가 드물다. 반면 현금지급기는 수수료도 안 떼거니와 어지간한 마을에는 다 있다.

나쁜 에스파뇰도 있다 @ 인간미 풍부한 에스파뇰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아 혹시 착각할는지도 모른다. 스페인에는 좋은 사람만 산다고.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프람이스터라는 마을 어귀 쉼터에서 만난 마음좋게 생긴 노인분이 좀 쉬었다 가라고 권하더니 이내 본색을 드러내 허벅지를 만지려고 들었다. 말이 안 통하니 따지기도 거시기해서 후다닥 도망가다가 뒤를 돌아다 보니 바지춤에서 '물건'을 꺼내서 흔드는 게 아닌가. 더 지독한 경우도 있다. 미국 여자 재닛은 '기쁨의 언덕'에서 순례의 감격을 되새기던 중 이런 남자를 만나서 기분을 확 잡치고 말았단다.

수신자 부담 전화 때문에 원성을 사다 @ 애국하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서 파는 우리나라 국제전화카드를 샀더니, 붙어 있는 이용 요령을 해독하지 못해 끝내 전화 걸기에 실패했다. 대신 한국의 지인들에게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었더니, 귀국한 뒤에 주위로부터 원성을 샀다. 국제전화비가 무지막지하게 나왔다나. 내가 아니라 요령부득의 매뉴얼을 원망해 다오.

이층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다 @ 19세기에 새로 세워진 도시 폰 페라다의 근사한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일어난 일. 새벽에 쉬를 하려고 내려오다가 숏다리라서 발을 헛디뎌 철제침대에 한 번, 대리석 바닥에 한 번, 머리를 두 차례나 들이박았다. 1층에서 자는 사람 발을 밟을까봐 조심하다가 본인이 황천에 갈 뻔했다. 운영자에게 하체가 짧은 동양인의 특수성을 들어 잘 부탁하면 다른 침대를 배정받을 수도 있는데. 입은 뒀다가 뭐하나.

이번 여행기 자체가 NG ? @ 글 쓰기가 지겹고 마감이 두려워서 직장도 때려친 마당에 산티아고 순례에 대해 글을 쓸 계획은 전혀 없었다. 애당초 '불친절한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의 e-메일을 받을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인터넷 검색을 잘 활용하면 산티아고 순례 길에 대한 자세하고도 꼼꼼한 정보를 무진장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열렬한 갈망과 튼튼한 몸 만들기가 그 모든 정보에 우선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