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글 싣는 순서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 9.10/생 장피드포르 (2) 아, 피레네-난 그대를 얕봤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를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 생 장피드포르(St. jean-pied-de-port) …" 비음이 잔뜩 섞인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못 알아듣는 프랑스어지만 역 이름만큼은 화살처럼 귓전에 날아와 꽂혔다. 꿈속에서 수없이 걸었던 그 길이 시작되는 곳,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외던 곳! 그곳에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키 큰 배낭과 등산복으로 완전무장한 이들은 역을 빠져나오자 도마뱀처럼 긴 행렬을 이루었다. 뒤만 따라가면 순례자에게 도보여행 증명서(Credencial del Peregrino)를 발급해 준다는 '산티아고협회'를 찾을 수 있겠지 안도하면서도, 이 많은 사람들과 여행 내내 줄지어서 행군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이게 얼마나 기우였는지는 다음날 즉각 입증되었지만). 이끼 낀 성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본 마을 정경은 천국 입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성문 주변의 작고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하는 순례자들, 바스크족 특산물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의 표정은 생기에 넘쳤고 여유로웠다. 이곳에선 혹 시계조차 느릿느릿 가는 건 아닐까. 산티아고 길을 가슴에 품게 된 건 '청춘을 바친' 직장을 그만둔 2003년 봄. 스무해 넘게 해온 기자 일을 접은 때이기도 했다. 긴 세월 언론사 특유의 살인적인 취재 경쟁과 '악마의 빚 독촉'보다 무서운 원고 마감에 시달리면서 술과 담배에 의존했던 탓에 나는 망가진 기계 같았다. 오후만 되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편두통에 시달렸고,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푹 퍼지곤 했다. 해마다 정기 이자 붙듯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날 몰라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몸무게와 반비례해 마음은 날로 메말라 갔다. 이렇게 살다간 책상 앞에서 쓰러지거나 회복 못 할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일단 담배부터 끊었고,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회사까지 '끊었다'. 죽는 건 면했지만 대신 허무감과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몸 바쳐 일해온 직장, 가족보다 더 아꼈던 직장 후배들이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고 즐겁게 지내자 상실감마저 느꼈다. 난 다 파먹은 김장독처럼 텅 비어 군내만 풍기는데…. 침대를 벗삼아 지내다가 함께 사는 친정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 해 집을 나섰다.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버스 한 정거장 거리도 걷기 귀찮아 택시를 타고, 직원 등반대회 때 산 중턱에서 헬리콥터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던 내가 걷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중독자의 우울증은 서서히 걷혀갔다. 걷는 데 익숙해진 뒤에는 가시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다. 종류를 불문하고 차들은 걷는 이에게 턱없이 적대적이었고, 길들은 걷다 보면 맥없이 끝나곤 했다. 길과 길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끊어져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럴 즈음 그녀의 책-아쉽게도 이름도 책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다. 여고 졸업 뒤 일찍 결혼해 남편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 간 50대 여성이 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긴 길'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차량의 위협적인 경적음 없이, 도로의 절망적인 끊김 없이 한 달 내내 걸을 수 있는 길! 홀로 길 떠난 이들이 끝까지 혼자일 수 있지만, 맘만 먹으면 글로벌 패밀리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길! 예전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다리가 질질 끌릴 즈음 순례자 증명서만 내밀면 값싼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집단 숙소)'에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길! 책장을 덮는 순간 난 혼잣말로 외쳤다. "꼭 이 길을 걷고 말 거야." '산티아고 가는 길'이 파올로 코엘류('순례자''연금술사'의 저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의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 열망은 더 깊고 간절해졌다. 막막하기만 한 내 삶의 후반전에 어떤 암시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 광속의 세상 … 질렸 다 2006.12.14 15:57 입력 / 2006.12.15 10:1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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