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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 도로 관련 주요 자료들-1

코리아트레일 2009. 1. 7. 21:28
조선시대의 도로 (1) / (펌글)조선의 넓은 도로를 경탄한 일본인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수 : 4606.11.01 00:35 http://cafe.daum.net/cjwhc/60Kn/784주소 복사

이 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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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조선시대의 도로 (1) 
 

 

 

 


들어가기 앞서(꼭 읽을 필요 없음)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에는 도(道)와 노(路)의 구분 없이 대로, 중로, 소로 등의 세 등급으로 '로'만 표현하고있다. 따라서 도로란 다분히 법제적인 용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길'은 도로의 일반명사로 그리고 말뜻이 변전되어 매우 규모가 작은 오솔길이나 자생적인 길의 의미를 지닌다.

육상 도로는 원래 사람의 발에 밟혀서 자연발생적인 통로로 생겼고 이것이 사람에 의해 개량되어 교통상 중요한 기능을 가지는 도로로 발달해왔다.

고대, 중세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부설된 로마 군도(軍道)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주요 교통로였던 하천에 이어지는 도로나 협소하고 폐쇄적인 경제지역 안에서 이용되던 장원도로(莊園道路), 길드도로 등 국지적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중세 후기에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 경제, 사회가 발달하면서 교역 도시가 성립되자 지역간의 교통이 활발해지고, 우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주된 요인이 되어 폭이 넓고 광역적(廣域的)인 도로의 필요성이 생겨남으로써 종래의 도로를 연장한 전국적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왕도망(王道網)이다.

도로의 교통량, 특히 마차 교통이 증가함에 따라 도로의 파괴가 심해져 도로 주변의 주민들이 그 보수 책임을 부담해온 종전의 방법으로는 도로유지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용자 부담의 턴파이크(turnpike) 제도, 즉 유료도로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에 따른 턴파이크의 건설이 구미 제국에서는 18~19세기에 급격히 성행해서 턴파이크 시대가 형성되었다. 그 무렵에 장거리 간선도로의 종합적인 운영방식이 개발되고 포장도로도 출현하였다.

 

 

 

 

 

 

조선시대의 도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도로망 역시 개성 중심의 도로망 구성에서 한양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도성 내의 도로 설비는 물론 전국의 도로망을 한양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조선 초기의 도로에 대한 정책은 태조, 태종, 세종 대를 거치면서 도로의 건설 및 관리, 노폭까지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세종 8년(1426) 한성부는 도성 내에서 중로는 수레 2궤(軌)가 통할 수 있게 하고, 소로는 1궤가 통할 수 있게 하며, 길 옆 도랑은 노폭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경국대전에 도로의 종별 및 노폭 등이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서울의 도로를 대로, 중로, 소로로 분류하고, 노폭은 영조척(營造尺: 30.65 cm)으로

대로 56척(약 17미터),

중로 16척(약 5미터),

소로 11척(약 3미터),

그리고 길 옆 도랑은 2척으로 정하고 있다.

이러한 도로 구조는 조선 말기까지도 규정상 큰 변화가 없었다. 도성 안의 대로와 중로, 소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로>
첫째, 황토현(黃土峴: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앞에 이르는 길,
둘째, 황토현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 흥인지문까지 서쪽으로 경희궁까지 동서를 관통하는 길,
셋째, 숭례문에서 대광통교(對廣通橋: 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길 등이다.

<중로>
첫째, 종로3가에서 돈화문에 이르는 길,
둘째, 종로4가에서 종묘를 끼고 가다가 다시 창경궁을 끼고 북쪽으로 혜화문(惠化門)에 이르는 길,
셋째, 을지로 입구에서 광희문(光熙門)에 이르는 길,
넷째, 충무로 입구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길,
다섯째, 사직단 입구에서 중학동을 거쳐 청진동에 이르는 길,
여섯째, 소공동 입구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 등이다.

그 밖의 길은 소로에 속한다. 이들 도로의 길이는 대개 9775보로 약 17km에 이르고 있다.

 

도리(道里)의 기준점은 도성 내는 성문(城門)이었고, 각 지방과의 기준점은 궐문(闕門)이었다. 창덕궁의 돈화문은 전국도로의 기점이었다.(현재는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기점표가 위치하고 있다.)

<각 방면 도리의 기준점>은 아래와 같다.

(1) 서북 방면
*숭례문-> 경기감영-> 영은문-> 무악재-> 홍제원

(2) 남쪽 방면
*숭례문-> 이문동-> 청파역-> 와요현-> 동작진
*숭례문-> 이문동-> 남묘-> 이태원-> 서빙고나루
*숭례문-> 이문동->청파역-> 당고개-> 습진터-> 노량진

(3) 서쪽 방면
*숭례문-> 약전현-> 아현-> 노고산-> 창천-> 양화도
*숭례문-> 만리현-> 마포나루
*숭례문-> 약전현-> 아현-> 노고산-> 창천-> 광흥창-> 서강진-> 밤섬-> 여의도-> 영등포

(4)동쪽 방면
*흥인지문-> 동묘-> 안암동천-> 제기현-> 북바위-> 무너미고개
*흥인지문-> 동묘-> 안암동천-> 제기현-> 북바위-> 안락현-> 중량포
*흥인지문-> 동묘-> 영도교-> 왕심리-> 차현-> 살곶이-> 송파

 

 

역도(驛道) (오늘날의 'XX번 도로'에 해당한다)

경기 8개,
충청 9개,
경상 10개,
전라 7개,
황해 3개,
강원 3개,
함경 3개,
평안 1개 등

총 44개의 역도가 있었다.
하나의 역도에 5~10 개의 역이 소속되었으며 세종때 역은 480여 개가 있었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537개처로 증가했다.

고려시대와 비교해 보면 역도의 수가 22개, 즉 두배 증가한 것인데 이는 도로 행정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역도의 수적인 증가는 행정구역의 정비와 더불어 지방 파악을 신속, 원활히 하기 위하여 세분되었기 때문이다.

각역에는 역장, 역졸, 역정(驛丁)이 있어 준비된 말로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이를 감독하는 찰방(察訪), 역승(驛丞)이 있다.

역, 역마, 역로 등을 관리하기 위하여 역마을(驛村)이 30리마다 존재했다. 역마를 사용할 때는 그 자격을 표시한 신분증으로 상서원(尙瑞院)에서 발행한 구리로 만든 마패를 사용하였으며, 여기에는 말의 수가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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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조선시대의 도로 (2)편을 올리겠습니다. 전국의 주요도로망으로 범위를 넓혀보겠습니다.

 

 

 

이 름     중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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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글)조선의 넓은 도로를 경탄한 일본인 
 

 

 

1897년(광무 원년)에 외교관으로 내한하여 약 4년간 주한일본공사관에 근무했던 일인(日人) 신부순평(信夫淳平)은

'경복궁 앞 가로와 신대궐(덕수궁)및 구미 각국 공사관의 소재지인 정동 부근과 동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서대문에 통하는 대로와 남대문에서 종로에 이르는 가로는 모두 노폭이 10칸 내지 20칸의 넓이이다. 특히 동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도로 같은 것은 우리 동경(東京)의 일등도로(一等道路)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광로(廣路)이며, 소로(小路)의 오예(汚穢)함에 비해 실로 당당한 대도회(大都會)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또 '한제국(韓帝國) 오백년간(五百年間)의 도부(都府)였으니 만큼 경성시가는 과연 구획정연하고 도로탄탄(道路坦坦)하여 동양의 대도회에 비길 때 조금도 손색이 없다. 나는 아직 북경(北京)을 모르지만 북경같은 것은 경성에 비할 때 도회(都會)로서는 백사(百事)에 걸쳐 훨씬 못하다는 것은 관풍가(觀風家)들이 자주 말하는 바이다'라고 했으며

또 지면을 달리하여, 다시 이들 대로를 다루어 '그 노폭은 모두 15칸 내지 20칸정도, 특히 동서(東西) 양대문 사이의 도로는 견마곡격(肩摩褐擊) 백사은성(百事殷盛)이다'라고 격찬하고 있다.

구한말 당시 서울의 큰 길의 넓이에 경탄한 것이다. 이 큰 도로의 노폭들이 얼마나 정확히 되었는지에 관해 조선시대의 기록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신부(信夫)가 10∼20칸 또는 15∼20칸이라 했으니 넓은데는 35m전후, 좁은데라도 18m는 훨씬 넘었을 것 같고 세 대로 중에서는 경복궁 앞이 가장 넓고 다음이 황토현(黃土峴, 광화문네거리)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그리고 숭례문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까지의 순서이었을 것이다.

[註44]신부순평(信夫淳平) 『한반도』 p.38, 1901, 동경당서점(東京堂書店)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3-2-7-3-2.html


다른 건 모르겠지만 조선의 넓은 도로에 대해선 경탄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후기에 가서 집이 무질서하게 건설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는 좁은 뒷골목이 많아지긴 했어도 주요 도로는 굉장히 정비가 잘 되고 넓었던 거 같네효.

 

출처 : cony의 옹달샘
글쓴이 : 허니대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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