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일 자유게시판

2009년 ‘행복한 중독’에 빠진 사람들 그들에게 기부는 □□이다!

코리아트레일 2009. 12. 31. 01:03

2009년 ‘행복한 중독’에 빠진 사람들 그들에게 기부는 □□이다!

올겨울 추우신가요. 이분들과 만나면 조금 따뜻해지실 겁니다.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에 올해도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 흑석동의 한 할머니는 남을 돕기 위해 폐지를 줍고 계실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사 대신 기부 전화를 거는 여교수님도 있고요. 화려한 삶 대신 나누는 삶을 택한 연예인 부부도 있습니다. “기부를 끊을 수가 없다”는 기부 중독자들. 2009년 한국 사회에 온기를 전해준 이들에게 기부는 무엇일까요.

약속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올해도 다녀갔다
노송동 사무소에 10년째 몰래 돈 전달 남성
“어머니 뜻” 편지 함께 8000여만원 보내


28일 노송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얼굴 없는 천사’가 보낸 8000여만원의 성금을 세고 있다. [전주시 제공]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님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니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여졌으면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성탄절을 전후해 출현하는 천사는 올해 10년째다. 똑같은 장소에 남몰래 뭉칫돈의 성금을 놓고 갈 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 추운 세밑에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28일 오전 11시55분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 20m 뒤편 세탁소 옆 공터에서 돼지저금통과 현금봉투, 편지 등이 든 A4용지 상자가 발견됐다. 상자 안에는 5만원, 1만원짜리 현금 뭉치 등 총 8026만5920원이 나왔다. 주민센터 직원인 허인회씨는 “30~40대의 남자 목소리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와 ‘세탁소 옆을 가 보라’는 말을 남기곤 곧바로 끊어 얼굴 없는 천사임을 직감했다”며 “동료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현금 박스가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 릴레이는 2000년 4월 초등학생 어린이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주민센터 민원대에 현금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가면서 시작됐다. 2001년 12월 26일에는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742만8000원을 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2002년 12월 24일에는 “사무실 앞 공중전화 부스에 성금이 있으니 이웃을 위해 쓰라”는 전화와 함께 현금 100만원과 61만2000원이 든 저금통이 발견됐다.

천사는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출현해 536만원(2003년)→545만원(2004년)→1045만원(2005년)→851만원(2006년)→2029만원(2007년) 등으로 선행을 이어갔다. 지난해에는 현금 2000만원과 돼지저금통의 동전 38만여원을 남겼다. 2002년 어린이날을 앞둔 성금까지 포함해 횟수는 11회이며, 금액은 올해까지 모두 1억6100여만원에 이른다. 성금 봉투에는 매년 ‘추위에 떠는 이웃에게 전해 주세요’ ‘지난해에는 경제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다들 힘내고 새로 뜁시다’ 등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메모가 함께 담겨 있다. 이 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전주시민들은 이 천사가 과연 누구일지 갖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성금 전달 방식이나 시점 등을 놓고 볼 때 신앙심이 독실하고 이웃사랑이 깊은 일가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뭉칫돈 기증자는 전화 목소리를 토대로 30~40대의 동일 남성일 것으로 추측한다. 올해는 편지 내용으로 미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유산에 자신의 정성을 보태 성금을 마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주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을 기리는 둥근 표지석을 노송동 주민센터 앞에 세울 계획이다. 당초 12월 중순께 제막식을 하려다 천사의 출현에 부담을 줄까 봐 내년 초로 미뤘다. 또 주변 270m의 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의 거리’로 이름 지을 계획이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주변에서 ‘온다, 안 온다’ 입방아를 많이들 찧었지만, 올해도 춥고 어려운 연말에 천사가 나타나 시민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한편 ‘사랑 넘치는 온정의 도시’라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전주=장대석 기자

보답

폐지 판 돈 모아 이웃 돕는 원성남 할머니
단칸방 홀로 살면서도 “받은 게 많아 행복”


작은 손수레에 종이 상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원성남(69·사진) 할머니가 수레를 끌고 서울 흑석동 비탈길을 내려갔다. 단골 고물상은 찻길 건너 5분 거리. 원 할머니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다. “27㎏이네요.” 1000원짜리 한 장과 100원짜리 여덟 닢을 쥐고 할머니는 비탈길을 되짚어 올랐다. 10㎡ 남짓한 단칸방. 할머니는 장롱 안에서 검정 비닐 지갑을 꺼내 돈을 넣었다. 이 지갑이 꽉 차면 할머니는 은행을 찾아 돈을 입금한다.

이렇게 올 한 해 모은 돈이 78만1943원. 지난 15일 할머니는 여기에 쌈짓돈을 보태 흑석동사무소에 80만원을 기부했다. 2005년 처음으로 폐지 판 돈 70만원을 기부한 뒤로 5년째다.

“나도 많이 받고 살았으니까, 그만큼 보답하고 싶었어요.”

군인이던 남편은 1966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딸은 여섯 살, 아들은 네 살이었다. 보훈처에서 알선해 준 방직공장에 다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발을 동동 굴러도 단칸방을 벗어나긴커녕 아이들 먹이고 입히기도 빠듯했다.

그때 가장 기다려진 것이 밀가루 한 부대였다. 매달 동사무소에서 주는 구호 물품이었다. 겨울이면 10여 장의 연탄이, 명절이면 아이들 양말이 나왔다. “그 밀가루가 얼마나 고맙던지…. 수제비 반죽을 하면 신이 났었지.”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원씨의 ‘보답’이 시작됐다. 1997년 한 복지재단을 찾아 “부모 없는 아이에게 돈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전북 부안의 한 소년에게 매달 2만~4만원을 부쳤다. 아이는 지난해 봄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 덕분에 자라서 취업을 했다”는 것이었다.

폐품을 모으기 시작한 건 2005년이다. 처음엔 할 일이 없어 용돈이나 쓸까 했다. 묵직하게 모은 신문지는 생각보다 값이 나갔다. 1000원짜리 몇 장을 쥐고, 그는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폐품을 주우러 다닌다. 오전에 두어 시간, 오후에 두어 시간씩 산책 삼아 동네를 돈다.

할머니가 매년 전달한 60만~80만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흑석동의 독거노인들에게 전달된다. “내가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며 산다고 생각하니 뿌듯하지. 자식들은 그만 하라고 난리야. 그럼 내가 막 화를 내. 가만 앉아 있으면 우울증이나 걸리지. 남도 돕고, 운동도 하고 얼마나 좋아.”

임미진 기자

소명

“넘치는 만큼만 나눠도 저희가 더 행복”
‘나눔 바이러스’ 퍼뜨리는 션·정혜영 부부, 집 장만 미룬 채 인세·모델료·강연료 선뜻


처음엔 다들 반짝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2005년 10월, 첫 결혼기념일에 그들이 매일 1만원씩 모은 것이라며 365만원을 ‘밥퍼 나눔운동’에 기부할 때만 해도 그랬다. 2007년엔 큰딸의 돌을 맞아 “돌잔치를 안 하기로 했다”며 2000만원을 서울대 어린이병원에 내놓았다. 가난한 아이의 수술비로 써 달라는 것이었다. 이듬해엔 아들의 돌을 맞아 또 2000만원을 기부했다. 부부가 쓴 책 『오늘 더 사랑해』의 인세 1억원은 장학재단 설립에 쓰였고, 부부가 찍은 광고 수익금 1억원은 최근 홀트아동복지회에 전달됐다. 최근엔 강연 수익료 1억원을 루게릭 환자인 농구인 박승일씨를 통해 요양소 건립금으로 내놓았다. 결혼한 지 불과 5년 만에 션(37)·정혜영(36) 부부는 기부문화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다.

“나누기 시작하니까 더 많은 돈이 저희에게 들어왔어요. 그리고 그 돈이 들어올 때마다 돈을 기부할 곳들이 나타났죠. 저희가 더 행복하려고 시작한 기부이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준비해 놓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 부부는 “기부는 우리에게 소명”이라고 말한다.

매일 1만원을 모아 기부하자고 처음 제안한 건 션이다. 결혼식 다음 날이었다. 두 사람은 특급 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정말 원없이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행복이 흘러넘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조금씩 나눠 보자고 제안했죠.” 큰돈이 아니었기에 정씨도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딸의 돌잔치를 계기로 기부금액이 커지면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4월 필리핀의 후원 아동에게서 온 카드를 보고 마음을 열었다. “한 번도 보지 않은 아이가 ‘사랑해요, 엄마(I love you, mommy)’라고 카드를 보낸 거예요. 제가 보내 준 몇 만원으로 어린이집을 다닌다면서요. 남편에게 ‘내 집 마련은 몇 년 미루자’고 했어요.” 부부는 매월 450만원을 필리핀의 어린이들에게 보낸다.

기부를 할 때 어떤 날을 맞아 어떻게 마련한 돈을 내놓는지를 공개하는 것은 두 부부의 원칙이다. 누구나 뭔가를 양보하면 당장 기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부부의 선행에 동참하는 이도 늘었다. 최근 션이 빈곤 아동을 후원하기 위해 10㎞ 달리기를 하겠다고 하자, 그의 홈페이지에 보름 만에 100명의 후원자가 나타났다. 루게릭요양소 건립 기금을 함께 내달라고 부탁하자 벌써 10여 곳의 교회가 응했다고 한다.

연예인인데 더 화려하게 살고 싶은 욕심은 없을까. 부부는 “저희도 화려하게 산다”며 웃었다. “저희도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며 살아요. 자기가 행복해야 남한테 나눠 주고 싶은 생각도 들잖아요. 저희는 넘치는 만큼만 나누는 거예요. 집은 꼭 지금 장만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고요.”


이현택 기자

습관

밥 한끼 줄여 매일 ARS전화 김금재 교수, “작게 베풀고 큰 기쁨 얻으니 기부 못 끊어”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김금재(62·사진) 전북대 명예교수는 전화기를 든다. 060-700-1212(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한 통, 060-700-1117(한마음한몸 운동본부)로 또 한 통. 이 자동응답전화(ARS) 두 통으로 각 2000원, 3000원이 두 단체에 기부된다. 이달 말까지 두 단체에 모두 600여 통의 전화를 걸었다. 전국 최다 ARS 기부자다.

처음 전화기를 들게 한 건 폐지를 줍는 노인이었다. TV 속에서 노인이 생계비를 벌려고 하루 종일 주운 폐지가 2000원어치였다. 등단 시인이기도 한 김 교수가 ‘2천원’이란 시를 쓰게 된 계기였다. ‘2천원/기호품 커피 한 잔 값이/어떤 이들에겐 하루 목숨줄’. 그날 이후 김 교수는 ARS 기부를 시작했다.

그의 기부엔 철학이 있다. 자기가 아낀 만큼을 기부한다는 것이다. ARS로 기부하는 5000원은 그의 아침 식사 값이다. 그는 차도 없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역시 건강을 위한 선택이지만 이렇게 아낀 돈으로 케냐·스리랑카·러시아·잠비아 등지의 빈곤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고마운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후원하는 케냐 아이가 보내온 것이었다. “생일이어서 10만원을 보내줬더니, 그걸로 양을 9마리 샀대요. 나한텐 크지 않은 돈인데, 그 가정엔 삶의 기틀이 된다니….” 그는 “작게 베풀고 이렇게 큰 기쁨을 누리니, 기부를 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