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정보

[세계의 컬트여행지](8)‘카미노 데 산티아고’800㎞ 도보순례(4)

코리아트레일 2007. 6. 14. 13:45
[세계의 컬트여행지](8)‘카미노 데 산티아고’800㎞ 도보순례(4)
입력: 2007년 02월 22일 09:24:58
낯선 길을 혼자 걸을 때 가장 큰 장애는? 당연히 안전에 대한 근심걱정이다. 아무리 길이 아름답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특별하다 해도 안전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렇다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안전도는? 설마, 순례자의 길인데… 예전엔 이 길을 걷기만 해도 교황청에서 평생 지은 죄를 다 사면해줬을 정도로 성스러운 길이라는데! 빙고!

단언하건대 세상에 이보다 더 안전한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먼 옛날, 처음 이 길에 순례자들이 몰릴 무렵에는 신의 음성을 듣기 전에 다른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기도 했다. 찬거리를 찾으며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 혹은 순례자의 여비를 노린 무장 강도단의 살벌한 위협 같은. 하지만 그건 이미 전설로 남은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이 길은 소심한 A형 여자가 혼자 걸어도 아무 일 없다. 겁쟁이 그녀가 타고난 ‘길치’이기까지 해도 걱정 없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므로. 노란 화살표나 가리비 조개 모양만 따라가면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되니까(야곱의 시신이 배에 실려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조개들이 그의 몸을 덮어서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가리비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상징이 되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는 순례의 길에 위험요소는 따로 있다.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한국인이기에 더 거부하기 힘든 유혹. 바로 포도주다.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이름난 와인 생산지다. 특히 순례길에서 만나는 라 리오하(La Rioja)와 나바라(Navarra) 지방은 양질의 포도주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포도주 인심도 후하다. 이라체의 수도원은 길가에 붉은 포도주가 물처럼 흐르는 수도꼭지를 준비해 놓았다. 목마른 순례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주의 피’를 받아 마신다. 밥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서면 “Agua o vino(물 아니면 포도주)?”라고 묻는다. 물과 포도주가 같은 가격으로 제공되니 자연히 포도주를 선택하게 된다. 스페인의 태양에 그을린 얼굴이 알코올 기운에 다시 붉어지니, 거울 따위는 아예 들여다보지도 말자.
세상의 끝에서 신발을 태운 순례자들이 바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고 있다.

이 길에는 포도주 말고도 스페인의 토속 음식으로 유명한 마을들이 있다. 로그로뇨(Logrono)에 들어서면 우선 라우렐 골목을 찾아가자. 스페인의 대표적인 간식거리인 타파스를 파는 작은 가게들로 유명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작은 골목이라 찾기가 쉽지 않으니 주의깊게 거리 간판을 들여다보자. 작게 썬 바게트 빵 위에 절인 멸치나 양송이, 새우, 샐러드 등을 올린 타파스를 와인 한 잔과 곁들여 마시노라면 혈관에는 이미 스페인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갈리시아 지방 멜리데의 문어요리 ‘뿔뽀’를 빼놓을 수는 없다. 고춧가루와 소금을 쳐 삶아낸 문어의 담백한 맛은 ‘문어의 재발견’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스페인식 해물볶음밥 빠에야도 갈리시아 지역이 원조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마을들은 저마다 한두개씩의 전설을 품고 있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전설을 들어보자. 때는 14세기. 젊고 잘생긴 독일인 청년이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가던 길이었다. 일행은 청년의 부모님과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하녀. 주인집 아들에게 연정을 품은 이 하녀. 어느 밤, 저돌적으로 마음을 고백했다. 청년은 냉담하게 모욕을 주며 처녀를 거절했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한을 품은 하녀는 성당의 금술잔을 청년의 가방에 넣었고, 결국 청년은 절도죄로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부모는 그래도 산티아고까지 성지순례를 마친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 신앙심 깊은 부모는 기적을 체험한다.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이 살아 있었던 것. 흥분한 부모는 마을의 신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며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한다. 막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던 신부는 부모를 무시하며 답한다. “만약 당신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 두마리도 살아 있겠구려.” 구운 닭에게 포크를 들이미는 순간, 닭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식탁에서 뛰어내렸다. 아들은 구제되고, 그후 이 마을은 살아 있는 닭 두마리를 성당 안에 보관하는 풍습을 몇백년째 이어오고 있다. 전설은 또 다른 전설을 낳기도 하는 법. 그 닭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고 해 닭장을 올려다보며 닭들의 은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옆 나라 포르투갈에도 똑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
가리비 조개 모양의 이정표를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

놀기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기에 축제를 빼놓을 수는 없다. 길의 초입에서 만나는 팜플로냐. 만약 7월초에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된다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놀아야 한다. 해마다 7월6일부터 1주일간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는 이 작고 오래된 마을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제다.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광기(!)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소와의 달리기에 도전하자. 매일 아침 8시에 돌이 깔린 좁은 골목길을 소와 함께 달리는 이 축제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소개해 유명해졌다.

저녁이 내리면 흰 옷을 차려입고 붉은 스카프를 맨 사람들이 맥주잔을 들이키며 밤새워 인생을 노래한다. 이때 소비되는 알코올의 양은 자그마치 300만ℓ. 해마다 축제 기간 중 수십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를 양산하는 악명 높은 축제이기도 하다. 단, 축제 기간에 이곳을 찾는다면 압도적인 쓰레기 더미에 먼저 눈이 가 고풍스러운 마을의 아름다움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사아군의 마을 축제처럼 주민들 전체가 중세시대 의상으로 분장하고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연극을 공연하며 벌이는 작은 축제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도 있다. 이테로 델 카스티요 마을의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는 매일 밤 순례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을 거행한다. 세족식은 그 자체가 가장 뜨겁고도 감동적인 축제다.

순례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문화유산으로 오래된 건물과 돌이 깔린 어여쁜 광장, 장엄한 대성당으로 유명하다. 그곳에는 둘러볼 곳이 너무나 많다. 최소한 사흘은 그 도시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한다. 산티아고 역시 해마다 7월25일이 되면 도시 전체가 축제의 무대로 변한다. ‘성 야곱의 날’인 그날은 종일토록 광장에서 공연과 춤판이 벌어지고, 불꽃이 밤하늘을 가른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며칠을 어슬렁거린 후에는 다시 신발끈을 묶고 걷기 시작한다. 사흘간 이어지는 90㎞의 길. 또 어딜 걷느냐 항변하겠지만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진짜 순례일 수도 있다. 로마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이다. 길의 끝으로 갈수록 길은 저 홀로 아름다워진다. 유칼립투스와 전나무가 우거진 숲을 건너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남해 바닷가의 작은 마을 같은 동네가 나온다. 피니스테레, 그곳은 순례를 마감하며 순례자들이 신발을 태우는 곳이다. 신발이라고는 한켤레밖에 없는 가난한 순례자는 그저 남들이 태우는 신발의 고무냄새를 맡으며 바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볼 뿐이다. 이미 과거가 된 지난 한달을 뒤로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꿈꾸며. 그 모든 일들이 끝나면 그때는 돌아오는 일이 남는다.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일상으로.

〈글·사진 도보여행가 김남희 www.skywaywalk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