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컬트여행지](6)‘카미노 데 산티아고’ 800㎞ 도보순례(2) | ||||||
입력: 2007년 02월 08일 09:24:04 | ||||||
너는 궁금하겠지. 내가 왜 작은 배낭에 단 한 벌의 옷을 챙겨 넣고 걷기 시작했는지. 그것도 우리에게 투우와 플라멩코 정도로만 기억되는 먼 나라의 오래된 옛길을. 그때, 난 이미 배낭 하나에 모든 걸 담아 세상을 떠도는 삶을 3년째 살고 있었는데.
그 길의 또 다른 비밀은 이거야. 그 길에서 너는 혼자이되 여럿이 함께일 수 있다는 거지. 너는 외따로 떨어져 혼자 핀 꽃처럼 그렇게 고요한 얼굴로 걸을 수도 있고, 외로움이 손님처럼 찾아드는 아침이면 사람들과 어우러져 길을 갈 수도 있으니까. 어깨를 기대고 늘어선 산처럼,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는 그런 날 말이야. 지구의 반대편에서 이 길을 걷기 위해 찾아온 나처럼 지구의 또 다른 건너편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걸어오고, 마침내는 우리가 그 길의 어느 지점에서, 혹은 길의 끝 산티아고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 삶이 건네는 신비한 은유 같지 않아? 어쨌든 그렇게 만남에 대한 가벼운 기대만을 품고 그 길에 섰어. 그때만 해도 산티아고는 그냥 길일 뿐이었지. 나에겐 무슨 거창한 질문도 없었고, 삶의 위기 따위도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난 그저 하늘거리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질문이 일기 시작한 거야.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새벽부터 오후까지 걷는 일 뿐이다 보니 마음 한편에 먼지처럼 쌓여있던 온갖 상념들이 폴싹이며 일어서는 거지. 시시콜콜한 욕망과 잊혀진 꿈들 말이야. 사랑도 그렇고.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내가 지친 적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 삶이 그렇듯 길 위의 일상에도 위기는 찾아오니까. 끓는 물에 데쳐지는 푸른잎 채소처럼 조금씩 숨이 죽어간 거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도 귀찮아지고, 그들이 건네는 인사와 호기심도 부담스러워졌어. 내가 왜 걷는지도 잊어버린 채 목적지를 향해서 걷고 또 걸을 뿐이었지. ‘하다가 중지하면 아니함만 못하니라’ 이런 유의 격문이나 중얼거리면서. 배낭은 지구의 무게와 맞먹었고, 스페인의 태양은 날마다 내 얼굴에 기미며 주근깨를 늘려갔고, 산티아고는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 저녁마다 해야 하는 빨래와 냄새가 배어버린 등산화, 값싼 바게트와 파스타에 물리기 시작했지. 물집은 여전히 기승을 부렸고, 무엇보다 ‘코골이들’과의 동침이 힘에 겨웠어(코를 곤다는 이유만으로 살의를 품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그래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야만 했어.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걷기라는 행위를 멈추고. 가끔씩 사람은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있어야만 하나봐. 잘 자라기 위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리가 필요한 것처럼. 이틀간의 짧지만 강렬한 휴식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고 난 후 다시 걷기 시작했어. 하지만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조금씩 불안해지는 거야. 질문에 대한 답 때문이었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한 답.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뭔지, 그걸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에 대한 답. 내 대답이 뭐였을 것 같아? 그래, 난 그냥 계속 이 길을 가기로 한 거야.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내 삶을 온전히 내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을 깨달은 거지. 그렇게 800㎞를 걸어 다다른 산티아고에서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산티아고의 대성당에서는 매일 정오에 순례자들을 위한 특별미사가 열려. 여름 한 철, 그 커다란 성당이 가득 차 앉을 곳이라고는 없지. 지구의 여기저기서 걸어온 순례자들이 햇볕에 그을은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을 한 채 바닥에도 주저앉고, 벽에도 기대 서 있어. 미사에서는 그날 그곳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순례 시작지점과 그들의 국적을 일일이 호명해. “생장피데포르에서 걸어온 한 명의 코리아노”라는 말이 들려왔을 때, 눈물이 흘렀어.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지켜봤을 그 오래된 기둥이 내 눈물을 지켜봐줬지. 내 안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고,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은 되지 않고, 난 그렇게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처음 눈을 뜬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던 거야.
너, 이런 생각해본 적 있니? 우린 저마다가 제각기 다른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작은 별들이야. 상상해봐. 저 넓은 밤하늘에 별 하나만 빛난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그 많은 별들이 다 똑같은 크기와 빛을 낸다면 또 얼마나 지루할까. 크기도 모양도 밝기도 다 다른 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너도 알고 있지? 그래, 산티아고는 내게 긍정의 힘을 남겼어. 남들보다 조금 모자라고 못난 나에 대한 긍정, 나와 다른 모습으로 때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긍정. 과거에 기대는 위안이 아닌,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닌, 현재에 대한 긍정. 오늘을 사는 나에 대한 긍정.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반짝이지 않을래’ 하는 별들은 없잖아.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첫 하루인 듯, 뜨겁게 사랑하고, 나누고, 더불어 같이 살아내는 것. 그 깨달음이 산티아고가 남긴 선물이었어. 그래도 네가 왜 산티아고여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래. 그 길이 꼭 산티아고일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여행이 단 한번도 건드려지지 않았던 영혼의 현을 건드리는 한 번의 만남을 위한 거라고 믿는다면, 산티아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 네가 언젠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질문을 품었을 때, 더는 미룰 수 없는 선택 앞에 섰을 때, 이 길을 떠올려준다면 좋겠다. 길의 끝에서 네가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는 하지 마. 이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네 안에 있으니까. 네가 아직 미처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니까. 산티아고가 네게 주는 건 단지 그 선택을 위한 숨을 고를 찰나의 시간뿐이야. 중요한 건 이거야. 네가 직장이며 아이, 가족같은 삶의 기반이자 제약인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이 길에 서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 이미 네 삶은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거지. 아직도 나는 가끔 꿈인 듯 그 길을 떠올리곤 해. 현명한 사람은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세상 이치를 깨닫는다지. 강인한 사람은 일상의 질곡 따위야 한 번 울고 난 후의 힘으로 버텨가기도 한다지. 하지만 아직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만 하는 나는 때때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멈춤’이 필요해. 그래서 올 가을, 포도가 검게 익어갈 무렵 다시 그 길에 서려고 해.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지키며 서 있는 네 몫까지 걸을 테니, 너는 내가 돌아온 후 일상의 위대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렴. 난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줄게.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 〈글·사진 도보여행가 김남희 www.skywaywalk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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