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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장 큰 걱정거리는 언어였다. 언어 소통이 가능할까? 답은 불가능. 스스로 생각해도 이번 여행이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수준'이 심각했다. 읽는 것은 정규 교육 받은 이들의 평균 수준. 가장 중요한 회화의 경우 외국인과 3분 이상 대화해 본적이 없다. 그러니 말하고 듣는 것이 거의 공포에 가깝다. 불어도 약간 배웠다고 하지만 그것도 몇 년 전, 이제는 숫자 세는 것도 가물가물하다. 설사 할 줄 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일까? 가는 곳은 프랑스가 아니고 스페인이거늘… 몇 개 적어 놓은 기초 스페인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난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어쨌든 간에, 떠난 것이다. 바디 랭귀지 하나 믿고서. 믿을 건 오직 '인포메이션센터'뿐 파리에 도착한 시각은 9월 8일 오전 7시. 공항에 내려서야 기막힌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이 어째 가볍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작은 가방을 집에 두고 온 것이다. 유레일패스나 디카 충전기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 알게 된 경험자가 보내준 영문판 산티아고 가이드북도 방안에 두고 왔다는 뜻. 아뿔싸! 했지만 이미 물은 쏟아진 상황.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일단 인포메이션센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흑인아가씨.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웅얼거리자 웃으며 천천히 말해보라고 한다. '어라? 이거 들리네?' 싶어서 자신 있게 "전철!"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가씨가 손짓하면서 터미널2로 가라고 알려준다. 공항을 나오자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확인하기를 몇 번, 마침내 터미널2로 가는 버스를 탔다. 터미널2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번에도 인포메이션센터로 갔고 그곳에서 도움을 받아 마침내 생장피드포르 역으로 가는 표를 구입했다. 가격은 100유로 남짓. 먼 곳에서 온 동양인을 위해 직원이 적어준 메모들을 열심히 해석하며 전철을 기다리는데 눈앞에서 의외의 장면이 펼쳐진다.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꽁초를 아무데나 막 버리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런다면? 당연히 벌금내야 할 일. 하지만 사람들 모두 태평하게 담배를 피운다. 이색적인 광경이다. 철로를 넘나들며 뛰어노는 사람들
놀란 마음에 이번에도 인포메이션센터를 찾았다. 그곳의 할머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이번에도 웅얼웅얼. 결국에 "디스, 표, 풋, 레드, 삐이!"라는, 문법 무시한 파격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다행히 할머니가 알아들었는지 내 표를 이리저리 보더니 옆의 문을 열어준다. 덕분에 무사히 통과. 몽파르나스 역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모두 빵 냄새. 이 사람들 정말 빵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열차 시간에 맞춰 타는 곳을 찾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한국에서처럼 기차를 타기 전에 표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곳이 없다. 놀란 마음에 이번에도 직원 붙잡고 표를 보여줬더니 그냥 타면 된 단다. 표 검사는 언제 하냐고 물었는데 불어로 '솰라솰라'하기에 알아들은 척 하고 그냥 탔다. TV에서 TGV가 빠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스피드가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정작 놀란 것은 통로에 있는 접이식 의자. 중간에 일어서야 한다는 불편이 있지만 자리가 없어도 편히 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한지라 도취되어 사방을 둘러보는데 역무원이 "무슈와"하며 내 어깨를 툭툭 친다. 그제야 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바욘역에 도착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역의 분위기가 자유롭기 때문. 걸어가며 키스하는 커플은 물론이고 다들 껴안고 난리도 아니다. 게다가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철로를 넘나들며 뛰어노는 사람도 많다. 정말 여기가 역이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더 당황스러운 것은 생장피드포르 역으로 가는 열차다. 조그만 장난감 열차 같은 것의 외모는 그야말로 낙서투성이. 한국이었다면 '위생상태' 어쩌고 하는 뉴스부터 '국가적 망신'이라는 기사가 나와도 몇 번은 나왔을 것 같다. "너 영어 할 줄 알아?"에 우물쭈물
하지만 나처럼 배낭가방 맨 사람들이 두루 보이기에 무작정 그들을 쫓았다. 예쁜 거리를 걸으며 내심 '생각 외로 언어가 통하네!'하며 뿌듯해 하는데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등록하는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곳에서 여권을 만들어주던 할아버지가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라고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이 계기. 내가 영어로 말할 수 있던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합하면 영어 공부한 지 10년이 넘고 그 사이에 외운 영어단어도 참 많지만, 문제는 그것들은 모두 암기였다는 것이다. 콩글리쉬라도 한다고 말할까 고민하면서 멀뚱멀뚱 할아버지를 보다가 겸손하게, 아니 솔직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이번에는 불어를 할 줄 아냐고 묻는다. 이번에도 절레절레. 더해서 "오직 한국어뿐!"이라고 말했다.
그들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본다. 한동안 서로 침묵 상태로 응시하다가, 내가 참지 못하고 "알베르게!"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번에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솰라솰라'한다. 그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스스로 구해보려고 일어나는데 할머니가 내 어깨를 살짝 누른다. 그리곤 서로들 다시 솰라솰라. 뭘 어찌해야 하나 싶어 멍하니 있는데 할아버지가 결심한 듯 내게 오더니 손을 얼굴 옆으로 모아 자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유, 원트, 쿨쿨?" 쿨쿨, 원해요! 왜 그리 그 장면이 재밌던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뒤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그런데 이게 오해를 불러 일으켰나보다. 대놓고 웃지 못한 것인데 할머니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오!"한다. 우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아서 표정관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나도 할아버지처럼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예스. 원트, 쿨쿨." 할아버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배낭을 둘러매고 따라가니 목적지는 바로 옆 건물. 이제 쉴 수 있겠구나, 했는데 이럴 수가! 산 넘어 산이다. 이곳의 주인할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불어만 할 줄 안다. 나보고 뭐라고 '솰라솰라'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알려준 대로 했더니 잘 곳을 알려준다며 따라오라고 한다. 기쁜 마음에 따라갔다가 눈앞의 풍경에 "헉!"소리를 뱉었다. 웬 덩치 큰 외국인 두 명이 문신을 자랑이라도 하듯 발가벗은 채로 나를 기다렸기 때문. 그들, 나를 힐끔 보더니 "하이!"한다. 나로 따라서 "하이…"하고 배정받은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옆 침대에 있는 외국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웬 근육질 아가씨가 나타나더니 남은 침대 위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이번에도 서로 "하이!" 타령. 이들 모두 순례자인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가씨가 침낭을 펼치더니 내 앞에서 옷을 다 벗는다. 갑자기 속옷차림이 된 아가씨, 나를 향해 윙크하더니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간다. 이 낯선 광경과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자문자답을 했다. '내가 정말 온 것인가? 온 것이다. 왜 온 건가? 온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온 것이다'라는 것만 혼자서 중얼중얼. 그 사이 불이 꺼졌다. 하나둘씩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산티아고를 향한 무모한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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